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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Dec 28. 2022

너를, 나를, 우리를

영화 <헤어질 결심>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다. 온전할 수도 없고, 아무도 온전해야 한다 한 적도 없다. 우리의 존재는 탄생과 동시에 세상에 던져진 채 살아간다. 때문에 우리는 동물적인 본능을 통제하고 타인과의 평화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윤리’라는 합의된 규범을 만들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에 따르도록 한다. 그 기준은 명확하고 절대적인 가치처럼 보여서, 어떠한 사건에 대해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누구나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살인 용의자 ‘서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가정이 있는 형사 ‘해준’의 이야기이다. 어찌 되었건 아내가 있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기에 ‘불륜’을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불쾌의 감정을 느낀 사람들의 평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 모든 것이 모호하게 그려졌다. 그들의 사랑을 미화한 적도, 그렇다고 선과 악의 기준 아래 그들을 무너뜨려 비난하지도 않았다. 영화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 치졸해 보이기도 한다. 흑과 백의 논리로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랑 안에서도 지켜야 할 ‘윤리적 규칙’은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윤리는 앞서 말했듯 명확하고 절대적인 가치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로 모호한 것이어서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누구와 합의된 산물인지도 답하기 어려우며, 어떠한 공동체의 문화나 시대적 사고방식의 반영이어서 그 잣대마저 명확하지 못하다. 단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교육받아 온 지식이다. ‘해준’은 가정이 있는 남자였지만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그 여자를 위해 형사의 본분을 버리고 살인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은폐했다. 그렇다면 ‘해준’은 말 그대로 ‘불륜(不倫)’, 즉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벗어난, 인간이길 포기한 비인간적 존재인가?


 그렇다면 영화 속 ‘해준’의 사랑의 과정에서 ‘도덕적인’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미혼자였다면? 혹은 ‘서래’를 위해 ‘정안’과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를 거쳤다면? 아니면 경찰의 본분을 지켜 그녀를 엄격하게 수사하면서도 사랑했다면? 그렇게 했더라면 ‘해준’은 사람으로서 도리를 지킨 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선택과 감정이란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반문에 반문을 거칠수록 절대적으로 보이던 기준은 모호해진다. 아니면 단순히 ‘해준’이 ‘서래’에게 빠져드는 사랑의 감정을 떨쳐 버렸어야 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불완전하며 완전하다는 기준과 완전할 수 있음조차 모호하니, ‘서래’에게 흔들린 그를 탓할 수도 없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기에.



 그렇다고 해서 불륜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며, 절대적 진리나 도덕, 윤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 결국 우리는 서로를 믿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세상에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가치들이 무너지더라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며, 그 믿음의 대상이란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신이든 믿음의 대상이 누구든 삶의 이유를 만들어 줄 존재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에. 어쩌면 같은 인간이 아닐 수조차 있다. 그 누가 되었건 서로를 믿고 그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서로가 서로의 기준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삶의 기준이 되었던 가치가 무너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죽음을 목전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도 사랑이라는 가치는 과연 그 힘을 발휘하고 우리를 움직일 수 있을까? 그 모든 가치가 완전히 붕괴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 단지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손에 쥐고 살았던 삶을 기록한 ‘빅터 플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에서, 그는 사랑의 힘을 설명한다. 자신 존재의 의미조차 잃은 수용소에서 휘몰아치는 추위와 폭력에도 그의 육체와 삶이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의 사랑하는 아내였다.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고,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은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우리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다. 영화에서 ‘해준’과 ‘서래’는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파멸을 맞이한다. 아마 그들은 주변 사람 뿐 아니라 서로에게도 계속해서 믿음을 저버렸을 것이다. 카메라는 단지 그렇게 불완전한 둘의 삶을 비추어 ‘해준’을 붕괴시키고 ‘서래’를 바닷속에 숨기어 파멸하는 둘을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은 모든 것이 모호하여 혼란스러운 우리 삶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살아가는 사랑의 가치를 간접적이고 역설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인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은 그 대상 존재의 유무조차 초월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고, 그 믿음의 사랑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것이 너를, 나를, 우리를 믿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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