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 디코딩 #001: 영화 터미널 다시 보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터미널(The Terminal, 2004)』은 매우 아름다운 영화다.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 扮)의 성실과 정직이 많은 울림을 주고, 아멜리아 워렌(캐서린 제타존스 扮)과의 짧은 만남과 사랑은 아름답다. 이에 호응하여 도움을 주고받는 주변인들의 모습 또한 인간적 매력을 더해 스크린 밖으로 훈훈함이 넘쳐흐르게 만든다. 영화 내내 얄미웠던 공항 책임자는 마지막 포기와 수용으로 성숙함에 이르고, 시선 둘 미움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나는 스필버그 식의 동화. 익숙한 문법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숨겨진 퍼즐이 좀 있는 작품이다.
빅터 나보스키는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미국 뉴욕시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갇힌다. 아버지의 나라 혹은 모국이 전란에 휩싸이고, 비자는 취소된다. 여권은 별다른 효력이 없고, 그의 나라로 돌아갈 항공기마저 없다. 공항에서 노숙하며 지내는 신세가 되어버린 그, 마치 천애 고아 같은 모습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부모는 그가 10대 후반일 때인 1967년에 이혼했다. 이 사건이 감독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출세작 『E.T.(1982)』는 사실 부모의 이혼을 그리는 자전적 소설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순간 고국이 사라진 나보스키는, 스필버그의 이 어린 시절 모습과 공명하는 캐릭터이다. 감독은 나보스키에게 부모의 이혼을 겪은 어린 시절을 강하게 투영하고 있다. 『터미널』은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쓴 영상 자서전이다. 아니면,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는 '메타 픽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스필버그의 부모와 나폴레옹, 조세핀 커플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혼했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둘이 이혼했다는 걸 다 안다는 점이다. 『터미널』의 주인공 커플은 우연히 마주친 후, 나폴레옹과 조세핀이라는 관심사를 공유한다. 그리고 나보스키는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준 기념물을 복원하여 감동을 선사한다.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완성,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 세기의 이혼 커플을 탐구하는 것이 그냥 우연인 것만 같진 않다.
이 은유를 조금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례 도식을 빌려와 보자. 움베르토 에코는 이 방식이 의미의 복합적인 응축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비판했지만, 사실 『터미널』은 기호학적으로 대단히 난해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이 정도 도구이면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도식은 '나보스키 : 아멜리아 = 스필버그 : 영화'이다. 나보스키가 세기의 이혼 커플(나폴레옹-조세핀) 서사를 복원하듯, 스필버그는 영화를 통해 부모의 파탄 난 관계를 복원한다. 전자가 후자의 은유로 전이되는 완벽한 대칭이다. 그가 영화를 찍고 그것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은, 결국 자신이 누렸을지도 모를 평행 세계의 행복을 스크린 위에 다시 그려보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에서 스필버그는 천연덕스럽게 주인공을 가족의 품으로 돌리는 서사를 완성한다. 그 이전엔 『A.I.(2001)』를 엄마를 찾는 아름다운 동화로 만들어버렸다.
이 거장, 흥행의 마술사가 영화를 한두 편 찍은 게 아니다. 평론가들의 비판을 예상 못했겠는가? 그렇게 서슬이 퍼런 사이버 펑크를 표방한 원작과 기획을 가족애를 둘러싼 따뜻한 결말로 이끄는 이유, 그것을 스필버그는 『터미널』을 통해 말하고 있다. 내 영화는 원래 이런 영화라고, 싫으면 다른 감독에게 맡기면 되지 않냐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스필버그가 자신의 영화만이 정답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나보스키는 아멜리아가 다른 남자에게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는 다른 감독 품 안의 영화도 모두 수용하고 있다.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게 자신의 영화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스필버그의 항변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 중반, 아픈 아버지를 위해 약을 반출하려다 제재를 받는 한 남자의 에피소드를 보자. 엄격한 규정을 들이미는 책임자 딕슨 앞에서, 나보스키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 약이 사람이 아닌 '염소'를 위한 것이라고 통역한 것이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 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서류상의 문제는 해결되고 남자는 약을 챙겨 떠난다.
이때 분노를 참지 못하는 딕슨의 모습은 묘하게 평론가들과 겹쳐 보인다. 치밀한 개연성과 이성적인 잣대(규정)를 들이미는 그들에게, 스필버그는 '염소(동화적 허용)'라는 핑계를 대고 기어이 '아버지(가족애)'를 구하는 결말을 내놓는다. 평론가들이야 딕슨처럼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든 말든, 스필버그는 아픈 사람을 살리는 게 먼저라는 식이다.
흥미로운 건 그 이후의 파장이다. 나보스키의 이 무용담은 공항 직원들의 입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간다. 살이 붙고 과장되어 영웅담이 되는 과정, 이것은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입소문(Buzz)과 너무나 닮았다. 평론가가 혹평을 하건 말건, 대중은 그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그를 지지한다. 급기야 공항 내 사람들은 복사기로 찍어낸 나보스키의 손바닥 사진을 곳곳에 붙여두기 시작한다. 유리창에 붙은 그 수많은 손바닥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남긴다는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의 핸드프린팅이 떠오르지 않는가?
결국 스필버그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A.I.』에 쏟아졌던 비판들에 대해 이렇게 응수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의 비평으로는 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봐라. 관객들은 나에게 열광하고 내 손바닥은 이미 명예의 전당에 걸려있다.'라고. '나는 내 방식대로 사람들을 구원했고, 그걸로 성공했다.' 이보다 더 우아하고 통쾌한, 거장의 자기 증명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메타 픽션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차례다. 도대체 나보스키는 왜 그토록 오래 공항을 떠나지 못했는가? 그가 뉴욕에 온 진짜 이유는 죽은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모았던 재즈 뮤지션들의 사인, 그 미완의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낡은 땅콩 깡통 속에 소중히 담겨있던 것은 ‘A Great Day in Harlem’이라는 유명한 재즈 사진이다. 57명의 거장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이 역사적인 단체 사진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한 명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여기서 '단체 사진'의 빈칸은 스필버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혼으로 찢어진 가족,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가족사진'의 결핍이다. 나보스키가 기어이 베니 골슨을 찾아가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행위는, 스필버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흩어진 가족의 서사를 다시 한 자리에 모으려는 집요한 노력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재즈란 무엇인가. 정해진 악보가 헝클어져도 즉흥적인 연주(Improvisation)로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예술이 아닌가. 계획된 일정이 꼬여버린 공항 터미널에서, 나보스키가 보여준 기지와 인간애는 바로 스필버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삶이라는 재즈'였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컬렉션'을 아들이 대신 완성해 내는 이 제의(祭儀)적인 과정이야말로, 스필버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 그 자체인 것이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나보스키는 기어이 베니 골슨의 연주를 듣고 사인을 받아낸다. 깡통은 꽉 찼고,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는 사랑했던 아멜리아와 이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돌아갔고, 나보스키는 이를 수용했다. 마지막 장면, 택시 기사가 묻는다. "어디로 갈까요?"
"집으로(Home)."
이 짧은 대답은 스필버그가 도달한 성숙의 경지다. 영화(공항)라는 환상의 공간에서 아픔을 치유하고 결핍을 채웠지만, 결국 우리는 현실(집)로 돌아가야 한다는 깨달음. 혹은 내 영화 속에서만큼은 가족의 꿈을 완성했으니 이제 편안하게 현실로 돌아가도 좋다는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스필버그는 『터미널』을 통해 관객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나의 영화는 결핍된 현실을 위로하는 마법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고.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것이 동화라 비판받을지라도, 그가 멈추지 않고 낡은 깡통에 꿈을 채워 넣는 이유다.
『파벨만스(The Fabelmans, 2022)』에서 스필버그가 카메라를 통해 부모의 균열을 목격했다면, 그보다 훨씬 전인 『터미널』에서 그는 이미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다시 결합시키고 있었다. 사실, 『파벨만스』는 사람들이 『터미널』의 메시지를 못 읽어서 찍은 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