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 디코딩 #002: 신의 섭리는 자비로운가?
이 글을 영화 처음 본 그날부터 쓰고 싶었는데, 이제야 쓰는군요.
10년을 질질 끈 게으름이란...
나홍진의 『곡성(The Wailing, 2016)』은 시골 마을에 퍼진 괴질과 살인 사건, 그 배후로 의심받는 일본인 노인, 그리고 딸을 구하려는 순경 종구의 이야기다. 오컬트 장르로, 영화 내내 사건을 속도감 있게 진행하며 스릴을 쌓는다. 그리고 결말의 참혹함은 관객에게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런 끔찍한 일이 왜 일어나는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이다. 그 '왜'와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 초반, 파출소 앞에서 기괴한 여인을 목격한 종구의 소동은 곧장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악몽이라 치부할 법한 이 상황을, 감독은 얼마 후 종복과의 대화를 통해 '실재했던 사건'임을 못 박는다. 이 패턴은 반복된다. 흡사 짐승 같은 일본인에게 습격당하는 다소 충격적인 시퀀스 직후, 종구는 또다시 몸부림치며 잠에서 깬다. 이번에는 즉각적인 확인이 없다. 관객은 앞선 학습 효과로 인해 '이번에도 진짜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야 무명의 입을 통해 확정된다.
"꿈 아녀."
실제 벌어진 일이 꿈이 된 이야기, 이 맥락에서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무명의 요구는, 지금 겪고 있는 끔찍한 현실이 다시 한번 '악몽'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마지막 가능성처럼 들린다. 만약 종구가 그 말을 따랐다면, 영화는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나는 장면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꿈속의 습격은 오직 종구만이 아는 체험이다. 이 일을 아는 무명 앞에서 종구는 직감한다. 이것이 단순한 현실이 아님을, 거대한 계획이 작용하고 있음을. 그러나 인간은 눈에 보이는 확신을 원한다. "너 뭐야... 사람이야 귀신이야?... 내가 그것을 알아야 니 말을 믿을 거 아니냐."라는 곧 절규가 될 질문에 돌아온 답은 "그냥 믿어"라는 서늘한 명령뿐이다. 감독이 이 세계의 조물주라면, 무명은 대리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은 계시이며, 그에 따르는 깨달음은 바로 섭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홍진 감독은 관객과의 질의응답에서 이런 답을 한 적이 있다.
어느 한 성직자 분에게 이라크에서 누군가 피살당했는데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가라고 물었더니 그 성직자가 "가지 말란 곳에 가서 하지 말란 짓을 해서 누군가를 살인자로 만들었다."라고 했다. 그 존재에 대한 납득이 되지 않음과 무서운 분위기들을 그 대화에 넣고 싶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금지된 것을 했다는 점에서 섭리의 위반인데, 이후 사건에 대해선 주객이 전도된 이상한 판단을 내린다. 이런 걸 넣고 싶었다는 감독,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위해 그가 어떤 세계관을 만들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신은 인간의 단방향 시간축과 달리, 태초와 종말을 한눈에 조망하는 '동시성'의 차원에 존재한다. 그곳에선 시간의 선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상태의 경계 또한 무너진다. 우리의 차원에서는 참혹한 비극을 겪는 인물이, 신의 차원에서는 따뜻한 자비 아래 평안을 누리는 인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즉, 신에게는 우리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이라 부르는 것조차 '이미 실재하는 현실'로 포개져 있다. 인간이 '섭리'라 칭하는 것은, 이 무한히 중첩된 상태 중 하나가 우리의 시간 축에서 결정되어 드러나는 순간을 뒤늦게 목격하는 과정일 뿐이다.
영화 밖의 감독 역시 이와 비슷하다. 촬영 필름은 상태의 중첩, 편집이 종료된 작품은 이미 모든 사건이 확정된 우주이며, 감독은 그 시간 밖에서 러닝타임을 통제하는 조물주다. 그는 프레임 안의 생명을 좌우하고, 인과를 비틀며, 필름이라는 닫힌 세계의 섭리를 주관한다. 그런데 보통의 영화가 확정된 하나의 세계선만 존재한다면, 나홍진 감독은 여기서 다른 선택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든다.
감독은 '야생 버섯 환각'이라는 장치를 통해 스크린 위에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동시성을 구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선언했다. 설령 그것이 환각일지라도 당사자가 지각하는 한, 그것은 엄연히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세계다. 감독은 이런 논리로 '환각(꿈)이라는 표상의 세계'와 '현실이라는 표상의 세계'가 같은 공간 위에 겹쳐서 작동하도록 무대를 설계했다.
이 시공간의 동시성 때문에 딸이 아픈 게 먼저라는 종구의 항변은 의미가 없다. 사건의 선후를 따져서 외지인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것, 죽인 것은 모두 정당방위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조물주에게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건 면책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오직 섭리를 위반한 사실만이 문제일 따름이다.
나홍진 감독은 세계 자체를 중첩시키고, 인물이 잠자는 사건과 습격당하는 사건을 같은 시간에 겹쳐 놓음으로써 이 영화의 세계가 동시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무효화시켜서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권능이 자신에게 있음을 관객에게 확인시켜 준다. 그 권능은 영화의 결말조차 뒤바꿀 수 있다. 감독은 이 권능을 영화에 투사해, 우리가 인식 가능한 3차원 세계에서 작동하는 섭리가 어떤 것인지 말하고 있다.
다시 종구를 보자. 그는 무명의 말을 9할 정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1할의 의심은 지금 당장 가족이 위기에 처했다는 현실로 향한다. 그리고 일광이 행동을 종용한다. 실제 우리 삶에선 꼭 위기와 공포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미 직감한 섭리를 의심케 하는 일이 많다. 그건 때론 유혹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섭리를 확신하고 따르는 것은 평소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시험의 크기에 따라 훈련은 별 의미가 없을 때도 많다.
종구에게 확신이 있어도 따르기 힘든데, 여기에 감독은 무명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던진다. 결국 종구는 무명의 손을 뿌리칠 수밖에 없다.
인생의 불행한 사건은 언제든지 일어나고, 그것이 섭리의 지각과는 하등 관련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섭리를 무시하고 사건을 겪은 후, 이를 다시 섭리 안에서 해석할 때 그 잔혹성을 마주하게 된다. '막을 수 있었다'는 자책, '뜻을 따랐어야 한다'는 후회는 영원히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감독에게 영화의 결말을 바꾸는 권능은 있지만, 최종 선택은 종구가 한다. 영원히 마음에 남을 후회와 자책은 종구에게만 온다. 어쩌면 신은 동시에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행복한 종구의 가족을 보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결말은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피투성이가 된 종구의 얼굴 위로 짧게 스쳐 지나가는 딸 효진과의 행복한 일상, 그것은 과연 회상일까?
결국 양이삼 부제에게 성흔(Stigmata)을 보여주며, "바로 나다"라고 말하는 자의 얼굴이 악마의 형상인 것은, 결국 이 섭리가 3차원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잔혹하게 다가올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누가 자꾸 문을 두드리고, 자꾸 들어오려고 그래.
이상한 아저씨가 들어오려 한다며 우는 딸 효진의 모습에, 성경 속 어린 사무엘이 밤중에 신의 부름을 받는 구약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성스러운 소명이 내려지는 순간, 그를 데리고 있던 제사장 엘리의 가문은 몰락을 선고받았다. "그 집의 죄악은 영원히 속죄받지 못하리라."
구약의 엘리 제사장은 아들의 죽음과 함께 목이 부러져 죽었다. 효진과 사무엘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종구 가족의 파멸이 정해진 것이라는 표현도 어색하다. 그것은 이미 다 벌어진 일이다. 우리가 보는 이 영화는, 이 동시성의 사건을 150 여분의 시간에 실어 3차원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신앙과 섭리에 대한 잔혹한 성찰, 이것이 영화『곡성』에 대한 또 다른 독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