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 디코딩 #003: 『캐치 미 이프 유 캔』에 대한 메타 시네마 분석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 2002)』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방대한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이다. 범죄자가 단독 주인공인 영화로는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 (The Sugarland Express, 1974)』 이후 약 30년 만에 나온 유이(唯二)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흥미로운 건 두 영화 주인공의 범죄 동기가 모두 '가족의 복원'이라는 점, 그리고 결국 그 동기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는 결말까지 판박이라는 사실이다.
거의 1~2년에 한 편씩 영화를 찍어내는 다작(多作) 감독에게 범죄자 주인공이 이토록 희소하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드문 주인공들의 서사가 이렇게나 겹친다는 것은 "스필버그는 동어반복이 심하다"던 당시 평론가들의 비판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A.I.』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무거운 SF 대작들을 거친 직후에 나왔다는 점에서 감독 이력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스필버그는 왜 굳이 28년 전의 비극적 테마를 다시 꺼내 들었을까? 물론 매력적인 원작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그 이면엔 분명 숨겨진 의도가 있어 보인다. 지금부터 그 의도를 파헤쳐 보자. 여기에도 '메타 픽션'의 퍼즐 조각들이 제법 흩뿌려져 있다.
이 영화, 부모의 이혼에 충격받은 프랭크 에버그네일 주니어가 가출과 함께 사기 행각을 벌이는 데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이 가출은 주인공 서사를 쌓기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은 마땅히 크리스마스 안부를 전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쓸쓸한 곳이다. 『터미널』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 물리적 공간이, 이 영화에선 서사로 드러난다. 그리고 감독은 여기에서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주인공에게 투영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이 거장이 말하는 '영화는 무엇인가?'를 들어보자. 감독은『터미널』과는 다르게 영화 산업 혹은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에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프랭크는 무려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 행세를 한다. 수업을 하고 숙제를 내고, 학부모 모임을 열어 수학여행의 행선지까지 정할 정도로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긴다. 감독은 그의 분명한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그는 사기를 치지만, 사실 그 시간 동안 그는 완벽한 '프랑스어 교사'를 연기하고 있었다. 넘치는 재능이 처음 발현되는 이 지점에서 지난번 『터미널』 리뷰에서 사용했던 분석 도구를 다시 한번 꺼내 들 수 있다. 바로 '배우 : 프랭크 에버그네일 = 영화 : 사기'라는 새로운 비례식이다.
영화와 사기는 본질적으로 '믿음의 게임'이라는 점에서 완벽하게 일치한다. 배우는 타인의 인생을 빌려 입고 그 사람이 된 양 행동하며, 사기꾼(Con artist) 역시 가상의 신분을 만들어 상대를 현혹한다. 둘 다 치밀한 각본과 완벽한 의상(Costume), 그리고 천부적인 연기력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관객이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벌어지는 일' 또한 일종의 '합의된 사기'다. 우리는 스크린 속의 빛과 소리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로 약속한다. 영화 이론에서 말하는 '불신의 자발적 유예(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다. 사기의 피해자에겐 자발성이 해당되지 않지만, 영화의 관객은 감독이 직조한 환상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공범자가 된다.
이러한 두 장르(?)의 유사점을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이미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스필버그의 영화적 재능이 프랭크 에버그네일 주니어의 기상천외한 사기 재능과 묘하게 겹쳐 보이는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재능이 있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낸다고 해서, 이 어린 사기꾼이 처음부터 어른들의 지갑을 털어 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그가 발견한 것, 바로 팬암 항공사의 파일럿 제복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에 확실한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캐릭터를 잘 세워 놓으면 이야기는 알아서 흘러간다." 이는 수많은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작법의 제1원칙이 아니던가.
그래서 프랭크 에버그네일 주니어는 '어떤 사기를 칠까'를 고민하기 전에 '누가 될 것인가(Casting)'를 먼저 결정한다. 파일럿이라는 배역이 성공하면 다음엔 의사가 되고, 그다음엔 변호사가 된다. 감독은 프랭크가 이 사기의 명세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영화 제작 과정과 완전히 등치 시킨다.
그가 사용하는 가명들을 보라. '베리 앨런(플래시)'와 코너스(스파이더맨)는 코믹스 히어로와 빌런이며, 그에게 붙은 별명은 '하늘의 제임스 본드'다. 그가 사칭하는 직업과 가명은 모두 대중매체 속 캐릭터의 차용이다. 프랭크는 제임스 본드가 되기 위해 본드의 슈트를 입고, 애스턴 마틴을 몰며, 본드걸과 같은 미녀와 밤을 보낸다. 그는 현실의 조종사나 의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속의 조종사와 의사'를 연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랭크는 완벽한 의사와 변호사가 되기 위해 전공 서적과 씨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TV 메디컬 드라마와 법정 영화를 보며 제스처와 말투를 익힌다. 한 배우의 연기가 다른 배우의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는 것, 이것은 촬영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스필버그는 이처럼 사기에 필요한 명세를 상세히 보여주며, 이것이 영화를 찍는 행위와 다르지 않음을 은유를 넘어선 직유의 화법으로 말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 명백한 '영화에 대한 영화(Meta-Cinema)'의 힌트를 모르고 넘어가기는 힘들다.
프랭크가 앞서서 화려한 사기 행각을 벌이면, 그 뒤에는 항상 사기 수법을 분석하고 행선지를 쫓는 FBI 수사관 칼 핸래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세웠던 비례 도식을 다시 한번 확장해 볼 수 있다.
수사관이 이미 벌어진 범죄의 뒤를 쫓는다면, 평론가는 감독이 이미 개봉한 영화를 사후적으로 분석한다. 범죄에 사용된 위조 수표의 잉크와 인쇄 기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핸래티의 모습은, 영화의 미장센과 서사 구조를 해부하는 평론가의 작업과 많이 닮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수사관 = 평론가'라는 도식 속에 숨겨진, 미처 보이지 않던 새로운 항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시차(Time Lag)에 의한 불리함'이다.
이 영화에서 평론가(핸러티)를 향하는 스필버그의 시선은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물론 첫 대면에서, 핸래티가 프랭크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는 장면은 일견 평론가에 대한 조롱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조롱이라기보다 감독(창작자)과 평론가(분석가)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정보의 비대칭에 대한 유쾌한 은유다.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없는 자신과 평론가의 가끔은 어긋날 수밖에 없는 해석의 여지, 감독은 '그 어쩔 수 없음'을 이 장면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감독이 보여주는 칼 헨리티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흥미롭다. 동료는 "매사에 원래 그렇게 심각하냐"라는 빈정대고, 상관은 그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며 질책한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조소들이 부당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유일하게 진지하게 '허구의 서사(사기)'를 탐구하는 핸래티의 집요함은, 대중의 가벼운 감상과 달리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하는 평론가들의 고독한 처지를 대변한다. 스필버그는 일반 관객들이 느끼는 '감상의 괴리감'에 대해, 오히려 평론가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변호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에서 프랭크와 칼은 훗날 『터미널』에 등장할 나보스키와 딕슨(공항 관리자)과는 완전히 다른 관계를 맺는다.
범죄자가 수사에 혼선을 주려 전화하는 건 흔한 클리셰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프랭크가 건 전화는 공기부터 다르다. 그들은 쫓고 쫓기는 관계를 넘어 각자의 외로움에 공명한다. 이때 영리한 수사관은 "전화 걸 사람이 없었겠지?"라며 프랭크의 폐부를 찌른다. 이는 거장 스필버그가 평론가들에게 보내는 자인(自認)이다. 당신들의 해석이 가끔은 내 내면의 가장 깊은 과녁을 꿰뚫을 때가 있다는 인정이다.
칼 핸래티는 프랭크가 어떻게 변호사 시험에 붙었는지 집요하게 궁금해한다. 하지만 막상 프랭크가 비결을 말하려 하자 칼은 말을 막는다. 스스로 알아내겠다며 정답 듣기를 거부한다. 그렇다. 창작자를 찾아와 직접 설명을 듣고 받아 적는 것, 그건 평론가의 태도가 아니다. 감독은 이 짧은 묘사로 평론가라는 직업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깊은 존중을 드러낸다. 그래서 끝내 주인공의 입으로 그 방법을 말하는 장면이 조금은 아쉽다. 관객에 대한 배려였겠지만...
영화의 엔딩, 둘은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새로운 위조수표를 함께 들여다보는 이 장면은 결국 감독의 선언처럼 보인다. 우리는 거대한 '영화'라는 환상 산업 안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료라고.
그렇게 그들은 동료가 되지만, 계속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건 허구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영화와 사기의 가장 큰 공통점은 이것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상대가 간절히 듣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말을 해줘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모든 쇼가 끝난 뒤, 범죄 수사관과 영화 평론가들은 항상 똑같은 종류의 허탈함에 빠진다. 차가운 이성으로 복기해 보면 우연과 구멍 투성이인 이 허술한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세상에 통했단 말인가?
그들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원한 건 논리적인 진실이 아니라, 매혹적인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결국 이 오래된 이해불능이 『터미널』의 따뜻한 냉소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