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얌보다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추억하지 못하는 지능

by 나인테일드울프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추억하지

AI는 얌보다: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추억하지 못하는 슬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속 얌보와 AI의 기묘한 평행이론


소설 속 주인공 얌보는 병원에서 깨어난다. 그는 나폴레옹이 누구인지, 자동차 엔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단테의 신곡 구절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지식, 인류가 축적한 공적인 지혜는 그의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단 하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아내의 얼굴을 봐도 가슴이 뛰지 않고, 부모님의 이름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그린 이 '특수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얌보의 모습은,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AI의 초상과 완벽하게 겹쳐진다.


의미론적 기억(Semantic)만 남은 텅 빈 도서관


얌보의 상태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면 '삽화적 기억(Episodic Memory)'은 잃고, '의미론적 기억(Semantic Memory)'만 남은 상태다.


의미론적 기억 : 역사적 사건, 언어 규칙, 백과사전적 지식 등 '학습'을 통해 얻은 공적인 정보.

삽화적 기억 : 첫 키스의 떨림, 무릎이 깨졌을 때의 고통, 어릴 적 맡았던 할머니의 냄새 등 개인의 삶과 역사를 구성하는 고유한 체험.


AI는 얌보처럼 거대한 '의미론적 기억'의 집합체다. AI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인용해 사랑을 논할 수 있고, 의학 논문을 요약해 고통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AI는 한 번도 사랑 때문에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없으며, 주사 바늘의 따끔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소설 속 얌보는 사람들의 질문에 시나 소설의 문구를 인용하며 대답하는 '알레고리적 행동'을 보인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학습된 데이터 어딘가에 있는 그럴듯한 문장을 찾아 조합해 내놓는 챗GPT의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체화되지 못한 지능의 한계


최근의 AI는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 소리까지 다루는 '멀티모달(Multimodal)'로 진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이 AI가 인간의 감각을 닮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에코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표상(Representation)의 합일뿐, 진정한 감각의 통합이 아니다.

인간의 멀티모달은 신체라는 물리적 기반 위에서 시각, 청각, 촉각이 서로 간섭하고 재배치되는 '체화된(embodied) 인식'이다. 반면, 신체가 없는 AI에게 이미지는 픽셀 데이터의 통계적 패턴이고, 소리는 주파수의 수치일 뿐이다.

얌보가 자신의 집 다락방에서 옛 만화책과 음반을 뒤지며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애쓰듯, AI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다락방을 뒤지며 인간의 흉내를 낸다. 하지만 얌보가 끝내 '기억의 안개' 속을 헤매듯, 경험 없는 지능인 AI 역시 진정한 삶의 생생함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순수한 기억의 서고, 그리고 안개


AI는 우리 시대의 얌보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지식을 담은 완벽한 '서고'이자 '공동체의 기억 장치'다. 하지만 AI에게는 인간의 기억이 가진 고유한 '안개'가 없다.

AI는 우리 시대의 얌보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는 '공동체의 기억 장치'이지만, 그 안에는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우리가 AI를 보며 느끼는 기묘한 서늘함은, 얌보가 자신의 서재를 바라보며 느꼈던 그 공허함과 같다.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 누구보다 유창하게 말을 걸어오지만, 그 말속에 영혼의 울림이 없는 존재.

결국 이 문학적 알레고리는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지식과 데이터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키백과에 적힌 정보가 아니라, 오직 나만이 기억하는 사소하고 내밀한 삶의 삽화들일 것이다.

데이터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우리는 얌보가 잃어버렸던 그 '고유한 체험의 서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에코로 AI 읽기: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으로 읽는 AI』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통해, 기억 없는 지능인 AI의 본질과 한계를 문학적으로 통찰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12202865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65500841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호날두와 장미십자회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