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름다운 니니 May 09. 2022

08 횡단보도가 어디 있는 거야

이제는 현실이다.

 정신을 차리고 내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이미 캐나다에 있었고 이것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자 실체가 되었다. 부모님과의 정서적, 물리적 거리가 필요했지만 막상 이렇게 외국으로 나와보니 막막함과 설레는 기분이 공존했다. 비록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고, 주변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멍하니 하루를 보낼 수 없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마침 구글 지도를 보니 주변에 식료품을 파는 마트가 있었고 그 안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북미까지 왔는데 스타벅스는 못 참지!

 자고 있는 아내를 보았는데 깨울 수 없어 커피와 먹을 것은 좀 사 오겠다고 쪽지를 남겨놓고 간단하게 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처음으로 걷는 캐나다 땅. 나에겐 모든 것이 흥분되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성안에만 있다 밖으로 나온 라푼젤의 마음이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신나고 조심스럽게 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폐에 집어넣었다. 강제로 쑤셔 넣듯 들숨 날숨을 크게 쉬었다. 내가 한국에 있던 봄에는 최악의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덮었다. 중국발 미세먼지와 한국에서 생산된 미세먼지로 눈앞은 늘 잿빛이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사람을 그릴 때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그려서 가슴이 아프지만 이때 아이들은 하늘을 회색으로 그리는 가슴 아픈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미세먼지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만큼 하늘이 맑고 공기마저 달았다. 눈은 깨끗해지다 못해 시력이 좋아진 기분이었다. 광활한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파아란색이었다.

파란하늘 위니펙

 내가 있는 곳은 위니펙 남쪽에  Bridge Water Center라는 마을이었다. 위니펙 남쪽은 치안이 굉장히 좋고, 중산층 이상이 사는 안전하고 깨끗한 새로 개발이 되고 있는 마을이었다. 아직은 개발 중이던 마을이라서 공사하는 곳들이 꽤나 많아 조금은 어수선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흔히 땅콩 주택이라도 부르는 서로 연결된 목조 타운 하우스가 들어서 있는 마을이었는데 집 뒤로는 모두 작은 잔디 정원이 있었고, 앞으로는 도로에서 자신의 집과 주차장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는 전형적인 영화에서 보는 그런 집이었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중간에는 커다란  시계탑이 있었고 그곳이 로터리가 되어서 신호 없이 차들이 서로에게 양보하며 지나다녔다. 이곳은 교통체증도 없고, 걸어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유동인구 자체가 없는 동네였다. 식료품점에 가기 위해서는 로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야 됐는데 문제는 로터리에 횡단보도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길을 건너야 되는데 횡단보도가 없다니... 잠시의 고민 끝에 대수롭지 않게 당당한 발걸음으로 길을 하나 건넜다. 건너고 보니 옆에서 경찰차가 나타났다!! 아뿔싸! 경찰차는 보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가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지출할 돈이 벌금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방향을 돌려 경찰차를 등지고 무작정 걸었다. '그래, 경찰차가 로터리에서 다른 길로 가면 길을 마저 건너자!' 경찰을 너무 신경 쓰면 범죄자 같으니까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걷는데 보니 이번엔 인도가 끊겨있었다!!! 사면초가라는 게 이런 걸까. 눈앞에 인도는 끊어져서 잔디밭과 연결이 되어있었다. 나는 돌아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던지, 혹은 잔디밭을 당당하게 걸어가야 됐다. 뒤를 돌았더니 경찰차가 내 눈앞에 뙇!!!! 너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살짝 더운 날씨 때문인지 경찰차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곳으로 경찰관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발 말 걸지 마라... 제발 말 걸지 마라... 나 영어 못한단 말이야... 제발 말 걸지 마라...' 느리게, 아주 천천히 경찰차는 나를 지나갔다. 아니 평범하게 지나갔는데 내가 유독 더욱 느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도를 찾아 다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가며 슬쩍 뒤에 있는 경찰차를 보았다. 경찰차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잽싸게 길을 건너갔다. 나중에 매니저한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매니저는 웃으며 말해줬다.

"형, 그건 여기서 무단횡단은 생활이에요. 그냥 건너시면 돼요. 경찰들도 안 잡아요."

그랬다... 그랬다고 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 혼자서 제 발을 저려했던 거였다. 그래도 나는 이제 캐나다 피플로써 한 단계 성숙된 것 같았다. 적어도 이제 이 동네에서 무단횡단쯤은 잘할 수 있을 거다!!  난 캐나다 살이 1일 차 캐나다맨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07 그래, 떠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