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발표글
아버지가 가끔 보고 싶다.
실존주의란 무엇일까. 인간은 죽음 앞에 던져진 존재란 것일까. 이성으로 모든 것에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던 사르트르도 말년엔 쓸쓸했던 모양이다. 신문기사 식 짧은 문장으로 유명했던 헤밍웨이도 자신에게 엽총을 겨냥했다.
아버지는 소화된 지식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나에게 이야기 하곤 했다. 이것저것 들은 것은 많으데 깊이 있으려면 자기 체험화 하라는 뜻일 것이다.(나를 처음 추천해주신 주필은 피로 쓰라고 했다.)
누군가의 시처럼 인간은 섬이다.
섬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내 안에 또 다른 섬이란 플랜b를 만들지만, 인간은 그래도 외로운 존재일 것이다.
바다도 비에 젖는다.
그리움도 슬픔에 젖는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전도서 4.2-3)
이 구절에서 소피스트의 철학이 느껴진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란 명제.’
기독교는 범사에 감사를 강조하는 줄만 알았는데, 전도서에 저런 글귀가 있어서 눈귀를 끌었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 실존주의는 인간이 철저히 고립되어 신을 바라보고 일반 대중에서 멀어지는 것이라 했다. 아버지는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내가 반발한 적 있는데, 가족보다 이념이 중요하다는 점에선 유사하다.
인간은 죽음 앞에 약하고, 이병주도 인생필패,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했지만 그 두려움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즉 사즉생의 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인생을 살아내는 것에 있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도 두렵지만, 삶도 힘든 것이다. 공자의 말 대로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알랴.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죽음을 언급할 때 그 이야기를 자꾸 들을 때 싫었다. 달리 방법이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좀 더 위로를 해드렸어야 하는데. 죽어서 영생을 갈 수 있다면 그다지 슬퍼할 일도 아닐 수 있다. 다만 믿음과 신념의 영역이다. 노자의 글귀, 죽으면서도 자신이 불멸하리라 믿는 자는 불멸하리라. 그 말은 우리 집 거실에 있었고 아버지도 글에서 언급한 적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진시황은 살부(殺父)했고, 오이디푸스도 살부하고 그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델포이 신탁을 결국 거역 못 한다. 운명이란 거역하는 자는 끌고 간다는 세네카의 말. 과연 이 시대의 우리들의 운명은 무엇일까.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시의 내용은 이렇게 기억한다. ‘죽어야할 인간일랑 행복하다고 여기지말라. 모든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되기까지.’ 그렇다. 우리는 떠난자를 그리워하지만 죽음은 분명 고통의 끝이다. (최근 캐나다에선 알락사를 적극 권장한다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라고 본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춘기 때 우리들은 한번쯤 고민한다. 건강, 이성, 직업.. 그런 것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을까. 신념..문학에 꿈을 꾸는 사람들도 가끔 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론 카뮈의 부조리는 삶자체가 부조리하다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는 본래 의미가 없는데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고 그 간극이 부조리란 것 아닌가. 삶이 의미가 있는건 죽음 덕분 일 수도 있다. 한번 뿐이기에 그럴 수 도 있다.(환생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째든 우린 살아간다. 각자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간다. 생각하든 무의식적으로든, 각자의 삶이 오이디푸스나 진시황처럼 극적이지 않더라도 각자의 역할을 인생에서 하는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멕베스에서 인생은 실체가 없는 하나의 망령에 불과해. 무대위에서 자신에게 배당된 시간 동안 뽐내며 걷고 안달하다가 그 소리조차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불쌍한 배우이지. ‘인생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야’....라고 했지만 난 나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겠다. 아버지의 아들 역할. 어디선가 보고 있을 아버지. 아버지와 어딘가 연결되어 있을 나의 섬. 인간의 가치가 희석되고 도구화되는 요즈음, 아버지가 계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내가 인터넷에서 본 글들을 동의하셨을까. 본인이 없으면 삼남매는 개밥의 도토리라고 하셨는데. 늘 알뜰하셨던 분. 더욱 분발하길 마음먹어본다.
추신-바다도 비에 젖는다는 어떤 의미인가. 비에 젖은 자는 더 이상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명약관화한데.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것이다. 바다도 비에 젖는다. 아버지가 보셨으면 호통치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