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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호 Aug 24. 2024

세가지 주제에 대한 소회

# 인간의 심리

인간의 불안, 즉 우리의 불안은 우주적 실존이다. 그만큼 우리는 심리적으로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에 중독되곤 한다. 드라마, 쇼핑에 중독된다. 견물생심. 이미 충분한데(충분이즘) 또 잡동사니를 산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현재(present)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이라는데,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르다. 가공식품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사곤 하는 것이다. 

건강과 평안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래서 또 불안한 것이다. 건강염려증으로 건강검진을 또 가야 할 것이다.(이제는 거의 사회적 의무가 되었다) 현대인은 물질주의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생명보다 돈이 중요하기에 아이도 낳지 않는 경향(tendecy)이 짙어진 것 아닐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지만, 몸과 정신은 연결된 것이다. 

남을 알고 싶으면 자기를 보라고 했다. 지금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과 강박..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이고 여기인데, 무엇이 불안한 것인가? 

불안감은 선택도 그르칠 수 있다. 주식을 빚으로 하지 말란 것도 그런 취지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면서도 모두 똑같다. 기소물욕 물시어인(논어), 네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우리의 생각은 성격은 잘 안 바뀐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그 심층엔 뭐가 있는가. 인간의 심연. 심리학에선 어린시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아들러는 우리 심리문제는 열등감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대인관계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혼자이면 외롭고 만나면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또 살아가는데 용기가 필요하며, 사는 게 용기라고 했다. 즉 인생은 살아내는 것이다. 마치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닌 극복하는 것이란 영화 대사처럼, 우리 내부에 원시시대의 불안 인자가 깊이 박혀있을지라도 그것을 용기로 극복해 내야 한다. 좌절 하기는 싶지만 용기 있는 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니까.

아들러는 그런 이야기도 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 하지만 똑같은 미래가 반복되면 단조롭기에 용기 있게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두고 거기서 대처하는 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란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가? 최소한 성경은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은 선택에 의해 달라질 것이다. 결과. 선태과 결과..consequences..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엄중함이 심리를 누른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역시 좌절을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죽음마져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사람에게 또 다른 강함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즉, 엄마와 탯줄이 잘릴 때가 실낙원이란 얘기가 있다. 그때가 불안감의 시초인 것이다. 그 불안감은 평생을 이어간다. 끊임없이 여성 편력을 해도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견고함과 탄력성을 모두 가질 순 없다. 뭔가를 얻기 위해선 뭔가를 잃어야 한다. 한비자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사랑하면 믿게 되기 때문이다.(즉 의심하란 이야기다) 성경은 사랑하라고 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예수가 있고, 사랑은 허다한 잘못을 덮는다고 했다.

우리의 불안, 나의 불안을 잠재워 줄 것은 사랑인가, 아니면 의심(지혜)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데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데서 생각한다. 나는 불안하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불안하다. 고로 인간이다. 그렇기에 협력한다. 아무도 혼자선 살아갈 수 없다. 글을 쓰는 것도 일기가 아닌 이상 누군가 볼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글로 자신의 불안을 쓰는 것도 하나의 테라피(치료)다.     

# 종교와 철학

철학은 종교의 시녀란 말이 있다.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철학적으론 자살(죽음)이란 문장도 있다.

종교와 철학의 공통점은 둘 다 기본적으로 죽음과 연관이 깊다는 것이다.

종교는 믿음이고 철학은 의심이다.

종교에선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철학에선 질문이 답보다 더 중요하다.

종교란 일종의 답이다. 삶을 살아가는 지침반.

마르크스는 기존의 철학이 세상을 해석하기에 급급했다며 본인은 세상을 바꾸는 철학을 하겠다고 했다.

세상을 바꾼다. 가슴이 뛴다.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늘 원한다.

20평에서 30평 집으로 이사가듯이. 그러나 변화란 대게 안좋은 방향인 경우가 더 많다.

행복은 쌍으로 오지않고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둘 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와 철학의 구분이 의미가 있는가.

북한을 보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은 가짜 사회주의라고 한다.

도그마(dogma)와 교조주의

종교의 교조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폭력성, 기독교의 배타성 등이다.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해서 좀 다르게 본다. 성경엔 분명 이웃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실천의 문제일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그에 앞서 당장 삶이 불안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인가 철학인가, 아니면 내 앞의 네가 필요한가. 그저 돈이 필요한가. 한정된 시간 앞에서.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삶의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 사는 이유를 가르쳐주는 것은 철학인가, 종교인가, 둘 다 일 것이다.     

# 돈과 섹스

돈과 섹스. 참 제목이 자극적이다.(둘은 어딘가 연결고리가 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비극이다. 돈은 주조된 자유(도스토예프스키), 돈, 불환화폐. 돈은 종이일 뿐. 신용.. 그래샴의 법칙. 모든 화폐는 결국 그 가치가 없어져서 사라진다고 한다. 

저번 글에서 욕망에 대해서 쓴 적 있다. ‘발기된 상태에서 철학을 논할 수 있을까?’란 문장을 기억한다. 성 앞에, 돈 앞에 나약한 인간.

섹스는 돈이 된다. 창녀는 돈에 몸을 팔지만 오히려 다른 거짓이 섞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탄받는 일. 그렇다면 무엇을 돈으로 살 것인가?

때론 너무 심심해서 죄를 짓는다고 했다. 지나친 가난이 죄를 잉태한다고도 고리키는 이야기 했다.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을까? 살 수 있겠지. 화대로 창녀를 사고, 돈으로 마음을 살 수 있어도, 아스라한 그리움은 없앨 수 없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일도 지나치면 번 아웃 된다고 한다. 물론 근육을 만들 땐 과부하 해야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화면이 없는 라디오가 티비보다 만족스러울 때가 있다. 심지어 스포츠 중계를 라디오로 더 재밌게 보는 사람도 있다. 부족함으로 오히려 넘치는 것이다. 위의 두 개가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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