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하지만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by 이규호

나를 밖에서 볼 수 없다.

나는 나를 가장 잘아는 사람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밖에서 나를 볼 수 없다.

삶에서 죽음을 직시할 수 없다.

어느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없으니까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했다지만

(그럼에도 두려워서 문제다.) 그 말데로 우리는 죽으면 없기에 죽음이 무엇인지, 살아있는 존재로서 전적으로 직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살아 번성하라는 존재로써 이땅에 온 근본적 한계일지 모른다. 죽음이 오면 죽음을 알리라. 나를 밖에서 볼 수 없듯이, 삶에서 죽음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울 지도 모른다.


동전의 앞뒷면이란 말을 국어선생님이 이야기 했다.

다 음과 양이 있다는 것이다. 이말은 다른말로 불행속에 행복이 있고, 호사다마라고 할 수 있다.

교통사고가 나도 그만한게 다행이지 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로또가 당첨되도 오히려 불란이 날 수도 있다.

암에 걸려도 오히려 생을 소중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고난이 약이 되기도 하고, 호의가 베품이 나쁘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삶이라고 무조건 다다익선은 아닐지 모른다. 수즉다욕이란 말도 있고, 준비없는 장수가 걱정이란 썸네일도 돌아다닌다. 그렇다면 죽음도 무조건 나쁜것만은 아니지 않을가? 죽음으로 고통이 끝이다. 그래서 스위스인가 어딘가에선 안락사를 한다던가?

그럼에도 극단에는 꽃이 피지않는다고 했다. 중용이 적당히는 아닐 것이다.

타협할 수 없는 가치, 그 무엇인가가 각자의 신념이자 짊어져야할 십자가가 될 것이다.


정반합이란 대립되는 가치가 새로운 현상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전쟁이 평화를 부르고 평화가 전쟁을 부른다면 삶이 죽음을 부르고 죽음이 삶을 부른다고 할 수도 있을까?

(전쟁은 가난을 낳고, 가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부를 이루고 부는 자존심을 낳고 자존심은 분쟁을 부른다고 한다. 조지푸텐함) 성경에선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이의 죽음을 가져왔고 한 사람의 부활이 모든이의 부활을 암시한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 son of man(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인가?)

위에서 얼핏 상대적 가치를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극단화할 순 없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란 이야기도 있지만....


역사가 승자를 기록할 때 소설로써 패배자를 기록한다.

말은 힘이다. 성경이 말씀인 것처럼.

밖에서 스스로를 볼 수 없는 존재가, 죽음으로 가는 삶속에 있는 존재가,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고군분투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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