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수필춘추에 기고 하려고 써놓았던 글?!

by 이규호


‘뉘집에 이거 읎지?’

이것은 동백꽃에 나오는 점순이의 명대사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점순이의 마음표현이다. 여성에게 고백받는 남자는 행복하리라. 나도 돌이켜보면 그런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상을,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하는 존재지만, 높은 곳을 바라보다 보면 오히려 추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바보같던 순간이 많았던가. 부끄럽던 순간들. 좋게 말하면 순진한 것. 니체의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 같다. 스스로 깨끗해지기 위해선 바다 같은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말처럼, 스스로를 보다 듬을 뿐이다. 일종의 자중자애가 필요하다. 영화 레옹에서도 레옹은 여성앞에서 바보같은 존재였다는 대사가 기억난다.

오늘 사실 난 4명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본회퍼,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칼포퍼.

대단히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본회퍼가 던진 화두이다. 저기 유태인이 끌려가고 있다. 교인들은 교회가서 기도하자고 한다. 그럴 때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것인가? 행동해야 하는 것아닌가 하는 화두. 꼭 유태인일 필요도 없다. 각자의 사회에서 사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기도를 할 것인가, 아니면 행동할 것인가 하는 화두. 난 사실 행동하는 종교인에 앞서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행동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과연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몇 년 전에 탈북인들을 다시 돌려보낼 때 종교계에서 비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 북한에서 몇십만명 이상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에 대해서도 크게 비판했다는 이야기도 과문해서인지 모르겠다. 암튼 결론적으로 종교가 행동하는 것은 옳다고 보지만 그 방향성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태까지의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하는 철학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일단 그 포부가 멋지다. 그 전에 철학은 세상이 이렇다는 둥, 했지만 자기는 아예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세상으로 바꿀것이란 것이 역시 문제로 남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잘 모르지만 전쟁터에서 논문을 썼다고도 하고, 일단 그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란 말이 유명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 침묵의 힘. 그러니까 나의 침묵이 너의 노래가 되게 하라. 우리도 님의 침묵이란 시가 있고, 서양 팝송에도 the sound of silence도 있고..예전 7080노래중에 솔개는 우리는 말안하고 살수가 없나..했지만 말은 수많은 논란을 낳지만 말은 해야 말이고..인간은 주술적 존재..결론적으로 행동해야하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갈거면 무위로써 차라리 침묵이 나을 것이다.

칼포퍼..유대인이다. 유대인은 크게 세파라딘, 아슈케나지가 있다고 하지만 세상의 부를 가졌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등..아 예수님도 유대인인데 그 예수를 유대인이 부정하는 것이 아이러니다. 칼포퍼는 불확실한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라고 했다. 좋은 말이다. 정치인들이 기억해 둘만한 말이다. 오컴의 면도날처럼. 그럴 수 있다면.

각자의 화두가 있지만...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점순이의 화두..뉘 집엔 이거 읎지? 하고 누군가 뜨거운 감자를 건넨다면..아..정반합이란 무엇인가. 각자의 화두가 어울려 새로운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인가. 사랑의 속삭임만큼 달콤한 화두가 인생엔 없지. 나의 침묵이 너의 노래가 될 수 있다면...만약 내가 글을 사리에 맞게 쓴다면 그것은 내가 꼭 괜찮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다소 엉뚱한 인간도 여기저기서 들은 화두를 정반합에서 던져내는 것이리라.

나는 본회퍼처럼 악을 보면 행동하고 싶지만 겁이 많아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아니지만 그저 침묵하고,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순응하기 급급하며 악을 제거하기는커녕 방관자로써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더 분별력을 갖춰 조금이라도 옳고 그름을 구별 할 줄 안다면 나의 영혼은 더 강해지리라.

‘뉘 집엔 이거 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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