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판단을 경계하고, 있는 힘껏 다양한 의견을 내 몸에 통과시킬 것
<좋아서 하는 공부>의 본질은
'이런저런' 컨텐츠를 능동적으로 흡수하며
동시대의 사회현상을 '이런저런 잣대'로 바라보는 습관을 길들이는 데 있다.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고, 가능한 한 다양한 의견을 내 몸에 통과시킬 것."
매일매일 레퍼런스로 삼을 무언가를 긁어모으다가, 이따금 보물 같은 텍스트를 발견하고
밑줄을 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되풀이되는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만 있다면 썼어도 그 자신이 썼을 글들이 들어 있었다. 그 책의 저자는 그와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 훌륭한 책이란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984』 /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이 남긴 말'(↑↑↑)을 떠올리는 삶.
그런 삶을 보내길 소망한다.
의식적으로, 꾸준하게끔 몸을 다독이면서.
요즘 들어 친구들과 똑똑해지기를 소망하며 이런저런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서로의 장점을 끌어내는 가운데, 친구들은 나의 레퍼런스 스크랩 방식에 흥미를 가졌다.
마침, 어떤 방식으로 레퍼런스를 스크랩해둬야 할 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기에
잽싸게 기록해둔다.
다음은 샘플 예시다.
저는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품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 뜨는 순간부터 무언가를 구경한다.
책이든 유튜브 영상이든 페북 타임라인이든, 고개를 처박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응시한다.
나는 모니터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들은 최대한 심플하게 훑어본다.
요컨대 정독이 아니라 '속독'이다.
섹시한 제목과 첫 문장의 탁월함과 마음을 사로잡을 문장 한두 줄을 찾아 마음 가는 대로 클릭한다.
예시로 드는 샘플 레퍼런스도, '어쩌다' '우연히' 타임라인에서 발견한다.
아 참! 좋은 콘텐츠는 건강한 팔로잉following에서 나온다.
의식적으로 팔로우해둔 건강한 콘텐츠 생산자들은 계속 양질의 정보를 제공해준다.
예시 샘플은 따로 퍼나르자.
예전에 즐겨 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자신의 일에 능숙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보고 있으면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능숙이라는 표현은 부족하고 거의 신의 경지에 올랐달까.
달인들은 각종 공장부터, 농어촌 마을의 작업장, 허름하고 분주한 식당 같은 곳까지, 거의 모든 노동 현장에 존재한다. 머리에 쟁반을 몇 층씩 쌓아 올린 채 유유히 인파를 헤치고 밥 배달을 하는 달인, 매의 눈으로 불량품을 잡아내는 달인, 뭘 던지면 기가 막히게 필요한 곳에 가서 꽂히는 던지기 달인, 종이봉투 접기의 달인, 셀 수 없이 많은 일터에 달인들은 낮달처럼 숨어 있다 별처럼 빛났다. 그들의 기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어려운 미션들이 주어졌을 때, 달인들이 그걸 기가 막히게 성공시키면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곤 했다.
나의 좌파 친구는 그 프로그램을 싫어했다. 화면 속에는 열악한 환경들이 자주 보였고, 유해한 물질을 다뤄야 하는 공정이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경우들도 제법 있었다. 달인들의 몸은 상처가 나 있기도 하고, 반복된 노동으로 신체 일부가 기형적인 모습이 된 경우도 있었다. 친구는 장시간 노동,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실제 삶을 가리고, 화면 너머의 진실을 왜곡하는 프로라고 비판했다. '프로불편러'다운 태도다.
나도 좌파이던 시절이니 달인들의 닳아빠진 손끝, 공장의 열악한 환경, 생산성과 비례하지 않은 임금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들보다 달인들의 표정, 고유하게 몸에 밴 태도들이 먼저 들어왔다, 넉넉함. 편안함, 선함. 이런 것들.
그들은 아무와도 경쟁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 자신의 월등한 능력으로 같은 시간에 동료들보다 몇 배나 되는 일을 해냈다. 손이 모자란 동료의 자리에 가서 기꺼이 모자람을 채워 주고, 동료들은 또 찬사와 우정으로 답하고. 날마다 봐도 질리지 않은 달인들의 능력이 늘 그 일터에서는 화제였다.
아,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저런 얼굴이 나오는구나.. 하나 같이 넉넉하고 선한 분위기가 똑같아서 신기하고, 그 기운이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결론은 나는 이래서 좌파를 못하는구나.
좌파는 ‘불편함’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불편을 감지하고 불편함을 주장하는 것이 사회를 이롭게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들의 항변이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낸 경우도 많다. 좌파는 매의 눈으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감지하고 그것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TV프로그램 하나라도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보다가는 진짜 넋을 빼간다는 경고를 보낸다. 나도 매사불편러이던 시절 그랬다. 그래서 요즘 매사불편러들의 피씨함(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강박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 사고의 과정을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는 게 있다. 그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려 들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달인에 대한 찬사 속에 가려진 열악한 노동조건과 구조의 문제는 눈에 들어올지언정, 정작 그 노동 속에서 자신의 존엄과 행복을 느끼고 사는 달인이라는 개별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은 조금 못나고, 돈을 덜 주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불합리한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와 별개로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손끝이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휘어지면서도 자신의 기능을 연마하는 걸 멈추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손에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 인간이 또 어쩌다 노조를 하기도 하고, 가족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장의 측근이 되어 노조를 방해할 수도 있는 거고.. 인간은 그렇게 다양한 존재이며, 같은 환경에 있다고 해서 똑같은 인식을 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모를 존재인가 인간이란 종은.
저 사람은 나를 왜 좋아하는지, 저 사람은 왜 나를 싫어하는지,
나는 저 사람이 왜 좋은지, 그 사람은 왜 나를 떠났는지(응?)
나는 여전히 왜 그 사람이 좋은지(얼씨구)
왜 아무것 아닌 일로 싸우는지,
왜 저만한 일에 저 정도로 화를 내는지. 왜 죽는지, 왜 저런 식으로 사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인간이란 존재다. 그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은 공허하고 위험하다.
해외의 아동을 후원한다고 하면 국내에도 어려운 애들 많은데 왜 외국 애들을 후원하느냐고 하는 사람들 있다.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쌀을 보내자고 하면, 한국에도 굶는 애들 많은데 왜 북한 애들을 돕느냐고 반대하고, 부잣집 애들까지 왜 공짜밥을 먹이냐며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좌파들은 기부행위나 자원봉사 같은 행위를 비판한다. 해외 아동과 자매결연을 하면 그런 원조가 사태의 원인인 제국주의자들의 본질을 가리기 때문에 문제라고 한다. 기부와 시혜는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모순을 지탱하는 사악한 장치라고 비판한다.
이건희 손주까지 왜 공짜밥을 먹여야 하느냐고 분개하는 이웃을 실제로 봤다. 심지어 자기 아이가 무상급식의 대상인데도 그런다.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언제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존재다.
공짜밥을 트집 잡는 우파나, 자선과 기부를 문제 삼는 좌파나, 서로가 서로를 매사 트집 잡는 불만세력으로 취급하는 건 같다. 거울 쌍이다. 당장 물 한 모금이 절실한 내전 국가의 아이한테 몇 만 원을 후원하면서 제3세계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이건희의 손주까지 공짜밥을 먹을지언정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해 인정할 수도 있는데, 그 둘이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편협함도 비슷하고, 인간의 선한 의지를 자신의 이념에 맞춰 재단하고 그걸 타인에게 강제하려는 폭력성도 비슷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요즘은 특히 노인들에 대해서다.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걸 단순히 일당벌이로 보는 시선, 소외돼서 불쌍해진 존재들의 외로운 인정투쟁으로 보는 동정적인 태도 둘 다 동의하지 않는다. 혐오와 동정, 모두 자신의 분석틀에 대상을 맞추려는 태도다. 목적론자들이 흔히 가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촛불을 든 자신은 신념에 의한 행동인데, 태극기를 든 노인은 일당에, 혹은 삐뚤어진 사고 때문에 나온 좀비로 취급한다. 그 중장년, 노년들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혐오보다 노인혐오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혐오를 개념화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자기방어용 무기들이 있지만, 노인들은 그걸 가지지 못했다. 장년층 남성을 포함해서 노인이 환영 받는 경우는 동세대를 혐오하는 '나빼썅'의 경우 말고는 없다. 노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고 입을 닫아라! 꼰대짓 하지 말고 지갑이나 열어라! 그런 류의 말. 자아 비판이나 동세대 혐오와 비난을공공연하게 하면 개념노인, 탈꼰대 사이다가 된다. 그런 감을 갖지 못한 장년층 아재와 노인은 그냥 반도의 흔한 '틀딱'이다.
피씨함이 거둔 많은 성과에도 그것이 두려운 이유는 사람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가치들을 죄악시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가진 특유의 열정, 도전 정신, 노인의 지혜와 경륜, 직장동료 사이에서만 가질 수 있는 끈끈한 유대, 그리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끌리는 대상을 향한 정념, 욕망. 이런 것들을 피씨함에 가둬서 정형화한다. 그들이 이루려는 사회의 총합은 내게 파시즘적인 '무균세상'으로 연상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참 어렵다. 단박에 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든 가능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이해는 하되 관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관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부터인가? 나에게는 그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있는가, 내 기준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가? 내 기준을 확장시킨다면 타인의 자유와 권리가 더 확장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은 언제든 가능하다.
달인을 욕하는 좌파 친구의 얼굴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런 고민을 시작했다. 달인 곁에서 해맑게 웃는 나쁜(놈인지는 알 수 없는) 사장놈을 무작정 비난하기 전에,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개인인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 낯설어 보이는 좌파 친구들을 포함해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말의 책임도 무섭게 느껴진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아마 평생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섣불리 비난하지 않고, 인간을 수단화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삶을 제물로 삼지 않을 것. 불편러의 삶보다 훨씬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 양심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글쓴이: 이선옥 / 출판기획자 르포작가
- 2010년 18회 전태일문학상 기록문 장편 당선
여러 매체에 글을 쓴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1:1 글쓰기와 르포작가 되기 강좌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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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씨함, 프로불편러, 틀딱
5.
이렇게 따로 추려낸 콘텐츠를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바꾼다.
텍스트와 이미지 중심의 콘텐츠는 가급적이면 종이매체를 이용한다,
물리적 형상을 띈 채로 읽는 편이 익숙한 까닭.
취향이자, 오랜 습관이랄까.
언어영역 비문학 지문 풀 때처럼 색을 칠해본다 상호 대립&호응하는 논리와 개념을 파악하면서 읽는다(*적당히 느슨한 마음으로 밑줄 친다. 시험 보는 게 아니니까), 근데 디지털로는 이 작업을 하기 까다롭더라. 굳이 출력해서 읽는 이유.
다시 디지털로.
콘텐츠에 얽힌 타인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읽을 것.
이런 루틴으로 1-6을 반복하고 있지만,
여기에 새로운 방법을 녹여내려 한다.
'수를 세면서 행동하기'
운동할 때, 시간과 장소에 따른 운동량과 횟수를 기록해두는 것처럼.
레퍼런스를 읽어내리는 일에도 수를 헤아리는 것이다.
이번 주, 이번 달을 기준으로 n번
장르와 포맷을 기준으로 n가지.
하는 식으로.
수영할 때, 몇 미터를 몇 분 만에 성공시켰는지 메모해두는 것만으로도
운동능력이 빠르게 향상되는 것을 감안하면
읽고 쓰는 행동에도 똑같이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 쌓이는 것이 어떻게 축적되는지를 관찰하면서 Raw Data가 쌓인다.
시간이 흐르고 돌아봤을 때 Raw Data를 샘플링하면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습관 같은 걸 발견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