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에게 매료되는 지점은 '지식의 깊이'가 아니라 '지혜의 유연함'
인문사회과학 계열에 몸을 담그면 '발터 벤야민'이라는 독일 출신 콧수염 아재를 반드시 만난다. 현대소설론 시간이었나... 졸면서 들었던 수업이지만 교수님은 유독 '벤야민'이라는 이름을 자주 입에 담으셨다. 문예사조론을 들으며 서구문예비평이론의 흐름을 톮을 때도 벤야민 이름 석자는 반드시 나타났다. 영화교양수업을 들어도 벤야민, 미술교양을 들어도 벤야민.
벤야민이 근대 이후에 성립된 문화문예비평에 관해서나 미학에 관해서나 탁월한 가치가 있는 저작물을 왕창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저작물에 적어둔 의견이 현대에 와서도 통한다. 여러가지 문화현상이 여전히 벤야민이 제시한 이론으로 해석된다. 아우라,아케이드,미메시스... 다 벤야민이 즐겨쓴 단어다. 현대에 와서도 벤야민의 위상은 튼튼하다. 벤야민의 미학이론만 정확히 알고 있어도, 오늘날 미적 감수성의 정체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고들 한다. 여기까진 남들이 말하는 것이고, 중요한 건 '나 자신'이 벤야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겠다.
돌고 돌고 돌아 다시 발터 벤야민. 아재의 명성엔 근거가 있었다.
나는 2016년 겨울, 서점에서 벤야민이 썼다는 논문번역을 번쩍 집어 들었다. 그의 대표 저서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40페이지 가량되는 짧은 분량에 '깊은 지혜'가 느껴졌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 물론 한번 읽고 이해할만큼 쉬운 텍스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흐름이 분명한 개념설정과 명료한 구조로 꾸려져 있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거듭 읽어봄직한 텍스트가 됐고, 나는 덕분에 논문 읽는 기쁨을 알게 됐다. 논문 같은 거 백날 읽어도 노잼이라 생각했는데, 속된 말로 꿀잼이다.
이렇듯 벤야민이 썼다는 저작물을 맛보기로 접한 와중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 바로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 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다. 동네 책방에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던 것이었는데,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안그래도 벤야민에게 부쩍 관심이 늘었는데 공부법이라니. <좋아서 하는 공부> 카테고리에 간직해둔 것, 벌써 블로그에만 30회차에 달한 포스팅 지난 2년 간의 공부패턴을 점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이런 책은 정독보다 속독이 좋다. 기왕이면 주목하고 싶은 부분에 빠르게 타이핑필사를 한다. 빠른 속도로 텍스트를 훑어나가되, 머릿속으로는 '주인공의 방식'과 '나의 방식'을 비교해보는 거다. 비교해보고 모방할 게 있으면 그 대목은 적극적으로 배껴쓴다. 이런 종류의 독서방식은 금방 체력을 뺏기 때문에 하루에 30페이지 정도만 읽는다.
서문부터 서른페이지를 넘기면서 들었던 생각은 안도감이었다. 감사하게도 벤야민이 공부하고 글쓰는데 들이댄 패턴은 내가 (어쩌다 보니 저절로) 쌓아올린 방식이랑 꽤 비슷하다. 내가 블로그에 스물여건의 공부기록을 남긴 것과 비슷하다.
불현듯 스친 생각은 틈틈이 모아다 저축. 조각난 생각에 살을 붙여가며 지어올리는 글. 퍼즐 맞추듯 써내리는 책. 여행과 수집은 중요. 공손해지기 위한 공부. 독방에 앉아 허세딸딸이 치지 않기 위한 공부. 관계맺기 위한 공부.
이 책을 읽으면 벤야민의 저작물이 아니라 삶을 쫓아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벤야민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패턴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이런 패턴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매일 30페이지 씩 수를 세며 읽게 되는 거다.벤야민에게 매료되는 지점은 '지식의 깊이'가 아니라 '지혜의 유연함'이니까. 우연찮게 비슷한 방식으로 공부했던 거, 기왕이면 제대로 따라해보는 게 좋겠지.
해서 나에게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 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란 책은 벤야민 텍스트를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책이 될 것이다.
내가 졸업 앞두고 취업준비하는 마당에, '다시' 전공공부를 검토하게 된 까닭은 지식만 많은 머저리가 되지 않기 위함이다. 이제 지식이 아니라 지혜wisdom가 우선시되는 세상이 왔다. 여태까지 배운 것들의 패턴을 확인하고 어떤 콘셉트로 엮어낼지 고민하는 게 최선의 답이지 않나.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혜'를 쌓는 과정이라 부른다면, 벤야민의 공부법은 탁월한 방법이 될 것이고 따라하다보면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쌓을 것이다.
모두가 4차산업혁명 운운하는 우리시대에, 삶의 질을 높이면서 커리어를 꾸려나가고 싶다면, 어떤 것의 원리와 패턴을 빨리 파악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 벤야민을 흉내내는 일, 미메시스야말로 그런 지적 능력을 키우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모방이야 말로 인간의 권능이자, 모든 문화예술창조의 근원 아니었나.
그러니 나는 적극적으로 흉내내며 갈고 닦을 뿐이다. 아마 어쩌다 이 기록을 구경하는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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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933년 이래 파리에서 벤야민의 삶은 평온하지 않았다. 그는 '여행자'가 아니라 '망명객', 즉 조국의 반 유대주의와 파시즘으로부터 목숨 걸고 탈출한 도망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은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출판 계약은 어긋나기 일쑤였으며, 동료들은 그의 '특이한'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해 걱정했다. 연구와 생활을 계속하기에는 경제 사정 또한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공부'를 팽개치지 않았다. 공부하는 것 만이 개인적인 불행뿐 아니라 비루하고 염치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며, 고장 난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다시 살만한 곳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방식이라고 그는 믿었다. 대혜종고 스님의 말씀처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하는 사람, 벤야민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벤야민의 망명생활은 공식적으로 생애 후반 몇 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일관되게 '바깥'의 삶을 지향한 존재였다. 학교보다는 학교 바깥, 고향보다는 낯선 도시들, 유행하는 물건보다는 오래된 사물을 사랑했다. 자신이 독일의 유대인 소수자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지식과 학문의 체계 안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으로 살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식과 학문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감각을 유지하는 것, 이것만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그는 새로운 것 보다는 '낡은 것'에 집착했다. 쓸모없는 것에서 쓸모를 발견하고,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해보이기 때문에 거창하고 세련된 지식의 영역에서는 배제되었던 어떤 것들을 말하거나 실천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사람과 시대에 대해, 사물의 배치와 제도의 폭력에 대해, 이성의 한계와 다른 감각의 능력에 대해. 이런 질문들에서부터 그의 공부는 출발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중략)
이 책의 일차적 관심은 벤야민이 품었을 법한 질문을 추적하는 일이고, 그 질문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해답을 찾아가는지, 그리고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으며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를 가늠해보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다시 지금 우리에게 공부란 무엇이고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바꿔 말해 주름이 풍성한 커튼의 안쪽을 들춰보는 것으로, 이 책의 각 장은 이런 의도 속에서 구성되었다. 예컨대 '왜 공부는 학교에서만 해야하지?'라는 질문은 학교 바깥에서 벤야민의 공부와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적 활동으로 연결되고, '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반드시 지도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벤야민 특유의 '길을 잃는 훈련'이라는 방법론과 연결된다. '이분법과 지식의 체계는 언제나 올바른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의 새로운 정리법과 실험을 엿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벤야민이 어떤 인물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했을 때, 그것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거리를 지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보들레르와 프루스트와 카프카를 '자기화'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없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워 나갔다. 이런 식으로 공부함으로써 그는 조금씩 다른 존재로 변모해갔고, 자신의 글 속에서 이를 표현했다.
벤야민을 통해 나는 프루스트와 카프카, 그리고 보들레르를 만났다. 벤야민 덕분에 사진과 건축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방식을 흉내 내면서 외국의 도시들을 여행했다. 그리고 가끔 뉴욕의 시립도서관 구석에 앉아,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자료 더미를 뒤적이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하나의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과 태도에 대해, 공부하는 자의 삶과 윤리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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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도 종교인도 번역가도 철학자도 시인도 그 무엇도 아니었지만, 그 모두이기도 했고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던 벤야민은 독특한 방식으로 공부했고,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주장으로 변형하는데 탁월함을 보인 이론가였다. 때때로 그는 기존에 지니고 있던 자기자신의 사유와 문장들까지 새로운 글에 인용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벤야민은 쉬지 않고 썼다. 생각이 떠오르면 지체 없이 썼다. 제대로 된 종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대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위에 썼다. 이런 식으로 휘갈겨 쓴 단상들은 다시 새로운 작업 속으로 그대로 삽입해 넣거나 수정해서 첨부하곤 했다.'*<Walter Benjamun's Archive>p.31 "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끊임없이 미완의 상태로 만들고, 실패로부터 자신의 강점을 배우며,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등을 일관되게 훈련해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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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의미에서 벤야민이 쓴 글들에 완결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완결되지 않은 것, 어딘지 모르지만 부족함이 있다는 경계를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근면함으로 모든 공부의 과정을 돌파하려고 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위대한 사람과 천재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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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비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행을 하거나 책을 사거나 장난감을 수집하는 취미를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 여행이나 수집은 책을 사서 읽거나 글을 쓰는 일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공부였고, 그것이 공부인 한 낭비나 사치도 아니므로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누리며,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거나 배우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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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한정된 지면에 글자를 적어 나가야 한다는 불편한 상황과 조건을 도리어 글쓰기를 위한 하나의 흥미로운 실험으로 바꾸었다. 제한된 여백에 작은 손글씨로 무언가를 쓰면서 손으로 글자를 쓰는 행위의 물질적 촉감에 대해 생각했고, 글씨를 쓰는 공간이 광고지의 여백일 경우에는 광고처럼 혹은 팸플릿처럼 글을 쓰고 구성하는 것을 고민했다.
그는 대중매체와 광고가 현실을 장학하기 시작한 시대에 그것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글쓰기의 혁명적 내용뿐만 아니라 충격적 표현방식도 함께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학자들의 보통 수준의 저작은 카탈로그처럼 읽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쯤이면 책을 카탈로그처럼 쓸 수 있게 될까?" 바로 이 문제가 그의 고민 지점이었다. 자본주의 도구로 자본주의를 타격하기. 누가 도구를 사용하는가,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어디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상황과 조건을 언제나 하나의 새로운 실험과 연관지었다. 그것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매번 중요한 공부였으며,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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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보통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성이 주로 논리적 이해가 필요한 지식의 습득과 연관된다면, 감성은 주로 예술(문학)작품을 대할 때 그것과 공감하는 능력과 관계된다. 공부로서 독서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전자의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일정 정도의 훈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개별적 취향과 감수성이 작동하는 영역이므로 일번적인 의미의 독서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낯선 것, 미지의 것을 읽고 이해하고 자기화할 때, 즉 그것을 다시 객관적인 방식으로(글을 쓴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지식은 발생한다. 이때 읽고 이해하고 자기화하는 과정 속에는 그 지식의 대상을 특정한 기준에 맞추어 체계화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된다. 이런 식으로 훈련된 우리의 이성은 어떤 대상에 대해 추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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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인간이 지닌 상위의 기능들 가운데 미메시스 능력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기능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모방적 속성을 지적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이나 동물들의 울음소리, 사물의 특징을 흉내 내는 아이들의 놀이, 낯선 언어를 반복적으로 따라함으로써 지식을 신체화하는 행위, 자연과 인간의 모습이나 특징을 모방하는 무희들의 예술적 표현의 이르기까지 인간의 미메시스적 능력은 광범위하다. 하지만 유사성을 인식하는 인간의 재능은 역사가 흐르면서 점차 쇠약해졌다. 춤이나 제의행사, 점성술과 같이 "우주에 존재하는 형상에 자신을 동화"시켰던 인간의 미메시스 능력은 점차 희소하고 특별한 재능으로 제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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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미메시스적 재능 혹은 자연(여기서 자연은 풍경으로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것의 일부인 우주 혹은 이 세계를 의미한다)과의 교감 능력에 관한 벤야민의 통찰은 한편으로 자연을 타자화하고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는 '계몽'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사라져갔다는 역사적 위기의식과 함께한다. 역사 속에서 타자화된 자연은 '야만'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모든 야만은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개발'되어야만 했다. 벤야민이 보기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336쪽 서구의 역사에서 '야만의 문명화'란 언제나 승리한 쪽의 관점일 뿐이고, 그들의 문화재는 전리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작동하기 전 인간에게 있던 미메시스 혹은 교감 능력이 '계몽'의 진행과 더불어 자본주의 시대가 출발하면서 쇠락했다고 보았다. 그가 볼 때 보들레르는 이러한 문제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알아차렸고 교감의 능력을 최후까지 간직한 마지막 시인이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존재였다.
(중략)
기술 문명의 발달은 지식을 대중화하고 사람들의 감각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지만, 경험과 모방으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이전 시대의 방식을 빼앗아가버렸다. 벤야민은 그러한 상태를 "지성의 인간다운 사용법"을 잃어버린 상태로 이해한다.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이성중심주의, 모든 것을 체계화하고 분류하고 목록화하는 것으로 인간과 사물, 자연과 세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실제로 인간이 갖고 있던 하나의 능력인 "예견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현실에 눈감게 만드는 "사회의 우둔함"으로까지 나아갔다.
'예견'은 인간의 신체가 자연(혹은 우주)과 가까웠던 시절에 경험과 모방으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던 인간들이 지닌 능력이었다.
(중략)
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새로운 신체'를 조직할 수 있도록 했다면, 벤야민은 그것을 통제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적 신체를 조직함으로써만 자본-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벤야민의 시대에 그 공동체적 신체의 이름은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중략)
새로운 신체를 조직하는 일의 중요성을 벤야민은 자신의 신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며 깨달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고독한 독서로서의 공부를 관계(나아가 공동체적인 것으로 연결맺는 맺기를 통해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확인된다. 청년 시절 그는 다양한 모임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공동체의 가능성을 질문했고,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더 다양한 지식인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통해 끊임없이 배워갔다. 독서를 통한 공부를 할때 조차 그는 단순히 지식의 습득에만 머무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보들레르를 만나면 보들레르가 되고, 프루스트를 만나면 프루스트가 되며, 카프카를 만나면 카프카가 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이에 더해 여행은 낯선 세계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공부법이었다. 그는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길을 잃고 헤매며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온몸의 감각을 다시 새롭게 조직하며 새로운 것을 만나 나갔다.
벤야민은 결코 골방에 홀로 앉아서 자기만족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려는 지식인이라면, 또 자기 시대의 문제와 고투하며 그것을 헤쳐갈 수 있는 역량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과 더불어 시대의 문제에 맞서야만 한다는 문제의식을 언제나 갖고 있었다. 그가 직면한 시대의 문제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