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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Oct 30. 2017

[#.3]작가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 정지용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정지용


애초에 작가지원자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령 소학(小學)을 마치고 중학(中學)에 입학해서 비교적 조숙한 학생 같으면 2,3학년부터 일반 독서력이 왕성해간다. 특히 문예, 문학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는 벌써 그들은 그 방향에 따라 독서를 촉진시키는 경향이 생긴다. 만일 그때 그 독서적 경향만으로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그건 너무 조숙하고 터무니없는 계획일 것이며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보통학과(普通學科)와 학식이 자꾸 축적되어나가는 중에 문학 예술적 충동이 왕성하며 왕성해질수록 억제할 수 없이 부지중 시나 산문에 붓을 들 수 있겠지. 동시에 이때는 벌써 그대들은 아름다운 청춘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니 이때 유의하여야 할 것은 그대들은 이미 인생의 위험기에 제일보를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문학작품의 애독자로서 청춘의 황홀한 환상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어데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부터 작가와 독자의 구별은 차차 운명적으로 결정되어가는 분기점이 된다.
 
소질이라는 것은 한 천재(天才)다.
 
그 아이가 작가적 소질이 나타난다고 하면 벌써 운명적으로 나타난 작가적 천재적 소질인 것이다. 그때부터 엄격하고 세밀하고 친절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 지도자는 그대들을 특별히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천재와 소질을 신중하게 또 서서히 유도하게 되는 이른바 기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작가는 벌써 천재인 것이다. 그대의 천재에 대하여 겸손하고 경건한 걸음을 걷기 시작해라, 유유히 흘러가는 그대의 청춘은 다분히 그대에게 시간을 주느니라. 그 시간 동안에 부지런하라. 탐구하라 생활하라. 다음은 그대가 알아서 할 것이지 내가 무슨 말을 또 하겠느냐.

그대가 시인일 수 있겠거든 스물 전후에 서정시에 발화하라.
 
만일 그대가 소설가 혹은 극작가일 수 있겠거든 25세 전에는 제작에 손도 대지 마라. 그때부터 연습하여라. 무엇이 늦어 초조하겠느냐 서른에 시험 삼아 발표하여 보아라. 그대가 과연 천재고 옳은 길을 걸어왔다면 엠파이어는 스스로 독자대중이니라.
 
독서의 범위를 문예작품 만에 탐닉하지 마라, 이런 책, 이런 책을 보라고 지적하지는 않는다. 보통 상식인이 읽어야 할 모든 부분의 서적을 충실히 읽기에 게을리 마라.
 
시인과 작가는 기악가가 가져야 하는 악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절대의 무기가 있느니라, 모어(母語)와 외어(外語)의 공부에 대하여 수험생처럼 유유하게 인색하라.              


학교에서 쓰기 스터디를 한다. 모임이 끝날 무렵, 정지용의 짧은 산문을 단체 낭독하자고 제안할 생각이다. 이번 쓰기 모임에 대해서는 간직할 만큼의 시간이 축적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뭐라 끄적이며 기록해둘 바가 없다.  다만 오늘 저녁에 있을 낭독이 탁월한 영감을 소환하고, 그것이 기록할 만한 장면을 이끌어내길 바라.

2년 전에 필사해둔 짧은 산문이다. 머리 굴려서 뭐 만드려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탁월하게 흡수될 텍스트라고 생각해왔다. 딱히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좋다. 정지용과 김수영의 산문은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 우리말 우리글을 잘 쓰려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거든. 이 두 명 말고도 이태준 박태원 염상섭 등등... 대한민국 모더니스트(내지는 그들과 가까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주목하라.

나는 근래 들어 20세기 초반과 21세기 초반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마 둘 다 시대의 전환기 내지는 과도기라는 유사성에서 나오는 걸 텐데... 여기서 피어나는 생각은 나중에 간직해두기로 하고...


모더니스트의 작가활동과 관련해, 덧붙이고 싶은 대담집이 있어 인용해본다.



신형철 : 방금 언급해주셨습니다만, 1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고전주의자니 모더니스트니 하는 수식어가 일종의 선입관으로 작용하고는 하는 이태준과 박태원 등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당대 현실과 치열한 상호작용을 경험한 작가들인지를 섬세하게 읽어주시는 장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작가가 북한에서 보낸 말년의 삶에 대한 증언을 소개해주시는 장면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최신 사조에 익숙했고 고급 취향의 소유자였던 모더니스트들이 식민지 현실의 압력 속에서 현실로 내려와 월북까지 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비판받고 예술적 재능의 날개까지 다 꺾여서 쓸쓸한 말로를 보내게 되는 그 곡절이 정말이지 눈이 뜨거워지더군요.

황석영 : 그래서 언젠가 내가 이런 농담도 했습니다. 서양에서 자라는 개들은 주인에게 사랑받고 잔디밭에서 뛰놀고 그러는데, 한국 누렁이는 시골에서 된장에 보리밥 말아서 던져주면 마루 밑에서 대충 먹어야 하고, 여름에는 주인이랑 친구들에게 몽둥이로 맞고 불에 그슬려서 먹힌 다고. (웃음) 이런 우리네 천덕꾸러기 누렁이들을 생각하면 한국의 문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 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여튼 감명 깊은 것은 이태준이나 박태원 같은 모더니스트들이 결국 식민지 현실과 부딪히면서 자기 주변 민중들의 참담한 삶에 다가가는 과정들이 작품의 연보에서 보인다는 거예요. 이들은 근대주의자였으면서도 식민지 근대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고 고통받는 당대 민족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모더니스트로 출발하여 리얼리스트로 마친 자기모순이었지만 대단히 눈물겹습니다. 그것은 아마 조선(한국) 사회의 특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건 70년대에 대해서도 엇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형철 : 그렇게 모더니스트들의 삶을 잘 읽어주시면서도, 그들이 젊은 시절에 쓴 작품에 대해서는 그래도 여전히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시더군요. (웃음)
'한국단편소설'을 시대순으로 읽고 싶다거나 재밌게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는 '인터뷰 아티클'.
황석영 :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모더니스트라 그렇습니다. (웃음) 내가 도시내기라서 촌스러운 걸 못 참아요. 누가 촌스러운 짓 하면 딱 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상(李箱)이나 박태원이 젊을 때 놀던 모습을 보면 뭐 요즘 하고 똑같죠. 나도 그렇게 놀았으니 잘 안단 말입니다. 그게 문청 시절의 치기의 일종일 텐데, 이상의 경우에는 ‘요절한 천재’라는 관점이 꽤 우세하고 또 엄청나게 많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내가 보기엔 좀 지나치지 않은가 합니다. 이상, 아름답죠. 그런데 이상의 모던함이나 천재성이 임화에 비기겠습니까. 이상의 죽음이 애처롭기는 합니다. 동경으로 갈 때 ‘이제는 어딘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봐야겠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갔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예전부터 이상의 수필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게 동경에서 고국을 생각하며 쓴 것들이란 말이죠. 

그 수필들에서 성숙미가 나오기 시작하거든요. 인생의 고통도 알고 깊이도 알고 그러면서 문학이 성숙해지고 그러는 것인데 그 문턱에서 그만 죽고 말아요. 어른이 되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상은 어른이 채 되기 전에 죽은 것 같아요. 소설이 나 산문이란 결국 세속에 눈뜬 어른의 세계이기도 하고.
신형철: 안 그래도 이상(李箱)에 대해 쓰신 문장들을 보면서 물론 공감하는 바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가 이상 이기라도 한 듯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웃음) 제가 선생님 앞에서 문자를 쓰기는 민망합니다만, 

가끔 학생들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뭐가 다르냐고 질문해오면, 저는 이렇게 답하고는 합니다.

‘복잡한데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리얼리즘은 의사의 발화, 즉 진단하고 치료하고 예감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모더니즘은 환자의 발화, 즉 찡그린 표정이고 새어 나오는 신음이며 기괴한 몸부림이다.’

그런데 이 단순 명쾌한 구분이 또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다음 말을 덧붙여야 하겠지요. ‘리얼리스트를 의사라고 하면 거리감이 느껴지겠지만 사실 이 의사는 환자와 섞여 부대끼고 심지어 스스로 환자가 되기 위해 거리를 좁힐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더니스트를 환자라고 하니 나약해 보이겠지만 이 환자들은 자신의 병에 거리를 두고 그것을 객관화할 줄도 아는, 의사의 지성을 가진 환자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이상의 문학을 문청의치기라고만 하기보다는 그 고통의 진정성과 배후의 지성을 알아봐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볼멘소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웃음)

황석영 : 아주 정확하고 좋은 비유입니다. 그럼요. 그런 부분이 있고 다 이해합니다. 나 자신이 그것을 통과하고 겪었는데 왜 모르겠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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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비로소 충만한 이 한국문학사를 웃지 마라” -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에 부치는 인터뷰 中 / 계간 『문학동네』 2015년 봄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뭐가 다르냐고 질문해오면, 저는 이렇게 답하고는 합니다. 

...

모더니즘은 환자의 발화, 즉 찡그린 표정이고 새어 나오는 신음이며 기괴한 몸부림이다.

...

모더니스트를 환자라고 하니 나약해 보이겠지만 이 환자들은 자신의 병에 거리를 두고 그것을 객관화할 줄도 아는, 의사의 지성을 가진 환자다.


쓰다 보니 오래된 텍스트 취향 하나를 밝히게 됐다. 나는 모더니즘 내지는 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시대와 저작물을 좋아한다는 것. 아무튼 오십 년 칠십 년 전에 싹튼 언어가 썩지도 않고 싱싱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더니스트의 글은 내게 맑고 정직하다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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