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의성'과 '캠퍼스 로망'
1.
언젠가 연극연출에 관심을 둔 과동기 J가 꺼낸 말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 사람이 하는 연기가 제일 좋았어! 아! 형 누구지...그......이름이 뭐더라...홍상수 영화에 자주 나오는...그... 관상에서 목 삐딱했던...뭘 하든 정말 자연스러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J가 말하려 했던 이름은 '김의성'이다.
김의성 형님은 요즘 이경영 형님이랑 투톱으로 엮이는 중견배우로
홍상수감독 영화를 본 사람이면 배우 김의성을 고정으로 출연하는 감초 배우로 기억할 것이다. 대화가 흐름의 축이 되는 홍상수월드에서 감독은 우리가 술자리에서 익히 봐온 자연스러움을 김의성 배우를 통해 자주 드러내왔다. 때로는 능글능글하게 때로는 푼수처럼 군다. 그가 소주 한 병들고 주연배우와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언제봐도 익숙하며 친근하다. 의성이 형님이 배우로서 오랜시간 쌓아온 금자탑이겠다.
최근에는 <암살>에서 눈을 번뜩이며 극 중 긴장감을 고조시킨 '집사'역할을 맡았고 <관상>에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서늘한 미소로 수양대군의 흑막으로 활약하는 '한명회'까지...
아무튼 메이저 마이너 가리지 않고 다작을 하셨다.우리는 의성이형님이 은근히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걸 무의식중에 기억한다.다만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건 그가 주연이 아닌 '조연'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극에서 튀지 않을 만치만 활약하는 것이 조연의 미덕이니, 나는 조연배우가 본래이름이 아닌 극중의 역할이나 극중이름으로 불릴 때야말로 제 몫을 다했다고 믿는다.
2.
나는 J가 꺼낸 말에 이렇게 답했다.
"아! 건축학개론에서 교수로 나왔던 분?"
내가 '배우 김의성'을 기억하는 가장 인상깊은 연기는
바로 <건축학개론>의 '교수님' 연기다.
내게 이 장면이 각별한 건 '캠퍼스로망'에 대한 판타지가 모두 여기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우선 해당 장면을 살펴보자.
Take1#
자!
이 도시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여기서
밥먹고
술먹고
학교가고
당구장가고
모오오~든
생활을
다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도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까?
의외로
넓거든
여기가...ㅎㅎ
-Take 1#-
고3때 책상 위에 머리박아가며 죽어라 공부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이유는 제각각인데 나는 '대학수업'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문학수업 수행평가를 위해 찾았던 <청소년을 위한 독일문학 콘서트>.행사는 홍익대에서 열렸다. 홍문관의 넓은 대형강의실은 내가 처음으로 조우한 캠퍼스강의실이었다. 드넓은 단상 위에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교수가 유창한 언변으로 괴테와 브레히트를 가르쳐줬다. 빔프로젝트는 커다란 벽을 크게 감싸 안는다. 영상을 타고 미래에 만날 대학선배들이 독일거장들의 명작을 2차창작으로 연출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옆자리에는 곱게 머리를 빗은 또래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생이지만 대학에 가서 (당시에 본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지만) 직접 인문대학수업 맛을 보니 아주 마음에 들어 그 뒤로 공부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재수까지 하며 학교에 들어갔건만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교수님이 달변이고 수업은 재밌으며 과제도 뜻깊은 수업은 멸종위기에 있다.
자! 그래서
내가 지도를 한번 준비해봤는데!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삐삐 누구세요? 쫌!
수업시간에는 끄자...응??
대학교수님은 무언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 믿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지긋지긋한 제도권 교육아래에서 만난 많은 선생님은 그저 진도 빼기에 급급하거나 학생들 휘어잡는데만 혈안이었으니...학생부 선도부장 선생님만치 엄격하고 근엄한 사람은 아니길 바랬다. 대학교수는 적어도 위트있고 너그러워야 했다.
자자 봐봐 이렇게 하는거야~응? 나는 요기!
은퇴직전의 노선생님보다는 열정적이길 바랬다.
우리집에서 38번 버스를 타고 요렇게~요렇게 요렇게~
강의는 지적호기심을 자극 할 수 있는 새롭고 참신한 것이어야만 했으며
~~삼각지를 지나 학교로 옵니다.
어떤 자잘한 공식을 외우는 게 아니라 거듭 생각할만한 큰 화두를 던져주길 바랬다.
그 것이 '큰 학교'에 '큰 돈' 주고 배우는 수업의 도(道)라고 믿었다.
자기는 집이 서초동이야? (네)
그럼 보광동이 어디야? (서울에 있는건가요?)
에헤~여기잖아 여기! 강건너 윗동네도 몰라? (ㅎㅎ 제가 강북은 잘 몰라서,,.)
나는 언제든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설마 틀리더라도 주눅들지 않을 패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묻지 못한 걸 물으러 왔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해서 내가 수강신청 때 가장 눈여겨 보는 점은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교수님에 관한 인물평이었다. 수강변경기간에 직접 들어가 받은 직관과 합쳐 최대한 좋은 교수님과 한학기를 보내려 애썼다.
결과는 대체로 좋은 편이다.
자기는 집이 정릉이야? (네)
정릉이 누구능이야? (정조??,,,정종??...정약용??)
영화 다보고 나와서 괜히 흉내냈던 은근한 명대사
Take2#
다음주까지 숙제가 있습니다. 리포오~트~
지금 자기가 사는 동네를 여행 해보는거야.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동네골목들 길들 건물들... 이런걸 자세히 관찰하면서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보세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Take 2#-
아무튼 그런 내게 영화<건축학개론> 수업장면은 내가 상상했던 대학수업의 로망을 내 머릿속에서 따다 옮긴듯 했다. 쉬크한듯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그 내용엔 뼈가 있는 수업. 어렴풋이 그렸던 대학수업의 이데아는 <건축학개론>에서 살아숨쉬고 있었다.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지난 캠퍼스라이프를 되돌아보면 대학수업의 진가는 '좋아서 듣는' 개론이나 교양 수업에 있지 않나 싶다.
낯설지만 그럭저럭 들을 만한 수준의 개론/교양수업을 들으며
볼 수 없는 걸 보게 됐고
생각하지 못한 걸 떠올리게 됐으며
느낄 수 없는 걸 느낄 수 있게 됐다.
풍부해진 상식은 더 나은 인식을 빚어냈고
예체능 체험은 낯선 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낳았다.
이렇게 새롭게 익힌 가르침은 시간이 지나며 몸에 익었고 삶의 많은 부분에 응용할 수 있었다.
알았어? (손을 휘저으며 수업이 끝났음을 알린다.)
실제로 대학 와보니 저 쿨내나는 제스쳐로 강의종료를 알리는 교수님들 은근히 많다. 다들 저게 맘에 드시나보다.
Take3#
에~~~이번 주의 과제는 '그곳에 살고 싶다.'!! 어디 좋은데 가서 놀다와~~
요새 날씨 좋잖아~
-Take 3#-
선생님이나 형누나들이 들려주는 대학이야기엔 언제나 '일탈'이 담겨있었다. 자체휴강이나 낮술낮잠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실행하는 일탈도 있었지만 교수가 직접 권해서 추진되는 일탈도 종종 제보됐다.(후자의 경우에는 90년대 학번 선생님의 제보가 많았다.)
실제로 나의 지도교수님도
"'일탈' 조차 수업의 일환이니
가서 마음껏 늬들하고 싶은대로 하렴.
출석 좀 안하면 어떠니?
볕도 좀 쬐야 좋단다."
라는 식으로 나오시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수업에서 제일 귀한 가르침을 얻었던 것 같다.
'일탈'조차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주시는 교수님은 대체로 교양/개론을 맡으셨고, 내가 대학에 와서 손에 꼽는 강의는 대부분 일탈 권하는 교수님들의 강의였다.
내가 대학에 와서 전공보다는 교양/개론수업을 더 많이 아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공은 기대보다 별로였고 진지하게 임해도 감당하기 벅차건만 교양/개론은 가벼운 마음으로 듣는데도 뜻 밖에 기억에 남는 순간이 훨씬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입문수준에선 어느정도의 흥미와 재미를 돋굴 필요가 있기에 교수님들이 꾀를 쓰신 게 아닐까?
특히 다른 계열은 몰라도 인문계열 학생의 커리어는 인문학적 지식을 몸으로 체화하는데서 갈리는데, 적절한 일탈은 캠퍼스강의실에서 얻는 가르침보다 더 크게 와닿기도 한다.
Take4#
에~~ 한학기동안 지루한 건축학개론 듣느라 고생들많았어요.
어때 건축학개론이랑 조금 친해진 것 같애?? 오늘 종강입니다.
뒷풀이 있는 거 알죠? 어... 잠깐씩들 들러서 맥주 한 잔씩 하고 가세요.
-Take 4#-
졸업 전까지 한 번도 말 안 섞고 헤어지는 교수님들이 더러 있다.
학생들한테 딱히 관심 없는 분도 꽤 계시고...
교수님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먼저 판을 깔아주시면 학생입장에선 정말 감사하다.
자리만 마련되면 한학기 동안 만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흔히들 고민하는 '캠퍼스인맥의 얄팍함'을 깰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만약 어떤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커뮤니케이션에 힘쓰는 분이라면
그 수업은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졸업하고도 진짜 스승이라고 모실 수 있는 교수님을 만나는 것은 단순한 '캠퍼스로망'이 아니다.
배움의 터전에서 마땅히 이루고자 힘써야 할 소중한 인연맺음이다.
끝~ (*대충 휘저으며 손을 흔든다. )나는 팔을 휘저어서 수업 종료를 알리는 특유의 제스쳐가 너무 좋아. 쿨내가 팍팍나
p.s 영화랑 엮어서 드립치시는 거 너무 웃겨 ㅠㅜ
김의성 배우는 연기만큼이나 능청스레 SNS를 활용하는 소셜테이너로 손꼽히신다. 관심있는 분들은 팔로하시길.
(*개인적인 사견으론 SNS를 가장 잘 다루는 분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살다보면 가끔 실언을 흘리는데 의성이 형님은 실언이 없다. 정치적 올바름을 담은 진담과 유쾌한 농담을 균형있게 흘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