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필년 May 06. 2018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화하는 이유

진술statement과 판단judgement를 중심으로

동생님이 내 방문을 발칵 뒤집으며 들어온다. "야~뫄뫄뫄!"라 하지 않고 "오빠아앙~있잖아..."이라 부르면 필시 사연 보따리를 풀어내리라.


"이 냔이 내 커피 원두를 또 몰래 내려먹었나?"

다행히 커피루팡 고해성사는 아니었으매, 외려 요즘 내가 커피 끊은 지가 언젠데 왜 네 걸 먹냐 야단이다. "ㅅㅂ...한방 먹었군." 고민이 있으시다는데 사연인즉슨 이렇다.

연애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주년을 전후로, 여느 때와 같이 데이트를 하던 여동생과 동생남친. 무릇 연인이란 태양이 지구를 한 바퀴 돌 무렵을 기점으로 서로에 대해 속속 알고 느끼는 법이다. 내숭 떠는 일이 멎어들고 조금 더 솔직한 모습으로 시공간을 포갠다.  아아~ 청춘남녀의 질풍노도 로맨띠끄-라뷰라뷰의 진실된 순간이여!

그러다 보면 미래지향적인 상상력이 싹트고, 연인은 자연스레 먼 모래의 유토피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이 커플의 애정 온도는 38.5도씨에 가까운지라 어렵지 않게 신혼 무렵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동생커플의 다이얼로그는 육아문제에 봉착하며 갑분싸.


동생 :"너도 나도 일할 테니까 가끔은 아이를 부모님께 맡길 수도 있겠다."
동생남친: "우리 부모님은 어렵지 않을까?"
동생: "그게 무슨 소리야?"
동생남친: "우리 엄마는 아프셔"
동생: "??!!"
동생남친: "....???? 농담이야 ㅎㅎ"

자, 이런 상황에서 내뱉는 "농담이야~"의 '농담'. 사전적인 의미와 가장 먼 뜻이 된다. 분위기를 적당히 눙치고 넘어가려는 토커는 리스너의 마음을 얼른 다른 테마로 환기시키려 하지만, 설사 웃는다 하더라도 웃음이 듣는 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진 못한다. 농담이 아무 말이 되어버린 것을 제3자인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동생은 이 다이얼로그의 해석을 두고 혼자 끙끙 앓기를 하룻밤, 타인에게 조언을 구한 게 이튿날, 사흘을 넘겨서야 방구석 오라버니에게 이실직고하기에 이르렀다. ok. 사연접수 완료.

동생님의 판단 회로는 다음과 같으리라.

너네 엄마만 아프셔? -> 우리 부모님은 뭐 괜찮다는 건가? -> 이 사람... 육아를 뭐라 생각하는 거지? -> 아 뭔가 실망스러운데? ...아니면 내가 괜히 너무 오버하는 건가? ㅠㅜ...조언이 필요해.




우선 나는 이 에피소드를 커뮤니티의 익명게시판에 올린 동생을 강하게 질책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익명게시판에 조언을 구하는 건 실질적으로 동생의 찜찜한 마음을 해소하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생아. 너의 마음은 잘 알겠는데,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 달아주는 애들이 너희 커플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게 몇이나 되겠으며, 너의 애인을 모르는 사람들이 글만 본다면 남친은 헤어지기에 모자람 없을 나쁜 놈인데, 실제로 남자친구가 그런 놈이냐? 그렇지 않음을 너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실제로 내가 확인한 해당 게시물의 댓글은 참으로 짓궂은 구석이 많았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의 떡밥은 남녀의 행동양상분석에 열심이고, 나쁜(혹은 나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블로킹할지를 고민하는데 있으니, 이런 떡밥을 남기면 100이면 90이 헤어지란 말만 읊게 되는 법이다.

한 10 정도의 여론만이 동생에게 침착할 것을 권유했다. 남자친구의 진심을 함부로 단언하기에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고, 내가 동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니 오빠도 지금 애인이 있어서, 내 애인에게 너의 남자친구처럼 말했다고 해도 썩 훌륭한 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네가 충분히 속상할 일이야.

그런데 동생아. 이번에 남자친구가 너한테 했던 말이 남자친구가 평소에도 그런 언행을 꺼냈니? 내가 너에게 듣기론 애인이 오늘 같은 말을 한 게 처음 아니야? 일관성을 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해. 평상시에도 그랬다면 모르겠는데, 순간의 말로 한 사람을 짐작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조금 더 잘 살펴봤으면 좋겠어.

"네가 네 남자친구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런 말과 행동을 바꿔버리겠다는 패기쯤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니? "사람 고쳐서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건 잘못된 말이야. 사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동생아. 네가 남친의 말로 말미암아 짐작되는 걱정 염려하는 미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더 잘 하게끔 알게 모르게 이끄는 것이 네가 남자친구를 더 수준 높은 차원에서 사랑하는 건 아닐까? 그게 너희의 연애를 더 돈독하게 만들지 않을까?"

여기까지 말했는데,  나를 부르는 친구의 연락이 들어왔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어 곧바로 나가야 했기에, 동생과의 면담을 잠시 멈췄다.




차라리 잘 된 노릇이다. 마침 나를 부르는 친구는, 이런 남녀문제에 있어 내 지인 중 가장 정확한 조언을 내릴 사람이었다. 그는 무려 8년의 연애를 슈마허처럼 드라이브해 결혼까지 주차시킨 베테랑 애정꾼.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화려한 달변을, 연극배우라는 취미는 복잡 미묘한 인간사를 너그럽게 여길 힘을 그에게 안겨줬다.

나는 지금까지 적어둔 바를 고스란히 친구에게 전달했고, 친구는 이렇게 진단을 내렸다.

이때 내 친구는 꼭  만화『도련님의 시대』에 나오는 나쓰메 소세키 같았다.

"네 동생이 진술과 판단을 잘 못 다뤘네. 동생남친이 내뱉은 말은 단순한 스테이트먼트 statement에 불과해. 지금은 그래. 남자친구의 말은 육아가 안된다는 이유를 상상하며 나올 수 있는 진술이야. 정말로 부모님이 몸이 안 좋다는 상태를 솔직하게 진술한 거일 수도 있고.

그런데 네 동생은 그 진술을 앞질렀을 뿐이고 자기의 틀 안에서만 저지먼트judgement한 거야. 동생이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동생이 남자친구의 진술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내린 판단은 아니게 되는 거야.


아! 현자시여. 그대는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를 확실한 단어로 압축해내는구려. 크으... 현자의 말을 계속 들어본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동생 애인이 현재 상황에 대한 진술을 했을 뿐인데, 내 동생이 판단으로 미래까지 앞질러 버려서 오늘의 만남을 망치고 있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응. 나는 연인 사이에 미래를 함부로 논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내가 우리 와이프랑 연애할 때 말이야. 난 우리 연애의 미래를 함부로 논하지 않으려 했어. 짝꿍이 '앞으로'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해서 대화가 미래지향적인 경우가 많은데, 나는 가급적이면 시제를 오늘로 끌어들였어. 동생한테도 잘 생각해보라고 해. 나는 와이프랑 결혼 한 것도 우리가 최대한 오늘에 충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

동생한테 전해줘. 정말로 애인과 오래 사귈 수 있을지를 검토해보고 싶다면,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집중하라고. 그리고 진술과 판단을 구분하고 그것을 고민하며 애인을 만나라고. 그러면 더 잘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내 생각에 사람은 함부로 판단하는 게 아니야."

나는 집으로 돌아가 이 전언을 고스란히 전달했고, 똑똑한 내 동생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딱 잘못하면 결별까지도 갈 기세였던 동생의 연애는 그 후의 데이트에서 서로의 말과 그것에 대한 판단을 솔직하게 공유하며, 오해를 걷어냈고 결국 무사히 연애 1주년을 돌파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갔다는 해피엔딩.



이 사건은 내 동생의 연애 위기탈출뿐만이 아니라, 내 인간관계 위기탈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내가 요즘 사람을 만나며 겪는 해프닝을 대처하는데 있어 탁월한 예방주사가 되었달까?


하나만 짤막하게 메모해두자면 나는 최근 두 명의 친구에게 절교선언을 접수했다. 얼마 전에 한 웹툰작가에 대한 짤막한 단상을 블로그에 남긴 게 절교의 씨앗이 됐다. 그들은 작가의 편을 옹호한 논리를 펼친 내게 실망한 내색이 역력했다.


한 명은 내게 정중히 여태까지의 만남을 고마워하는 작별 편지를 남겼고, 다른 한 명은 나와 열타래 정도의 대댓글로 설전을 이어가더니 결국 친삭을 시전다.

그들과의 이별이 내게 미친 슬픔이 만만찮았지만, 웹툰작가에 대한 내 입장은 내게 있어 양보하기 어려운 진심이었기에, 그들의 작별 인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다만 내가 아쉬워하는 건 그 글로 말미암아 그들이 내린 나에 대한 판단이다. 그들은 나의 말과 나를 일치시켜 판단했다.

그 판단은 과연 나에 대한 정당한 판단인가? 이 판단을 내리며 사용된 잣대와 평가는 과연 탁월했나? 어떤 사안에 대한 성명서statement가 한 개인을 판단하는데 있어 효과적인 잣대가 될 수 있을까?

현대인에게 판단은 의무다. 매 순간 판단해야 할 일은 어찌나 많은가. 오늘은 또 어떤 옷을 입어야 좋을지. 머리는 어떻게 만져야 좋을지. 이건 어떤지 저건 어떤지 고민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고로 빠른 판단은 미덕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을 판단하는 일만큼은 느려도 좋지 않을까? 인간은 고정된 실체substance가 아니기에 타인은 수정가능한 가설hypothesis 정도로 생각하는 게 훨씬 유익하다. 나는 그렇게 믿고 사는 편이다. 내 동생이 나를 대할 때와 애인을 대할 때가 다르듯, 우리 부모님이 우리 아들딸을 다루는 게 직장동료를 다루는 모습과 다르듯. 인간은 얼마든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모습을 달리 펼치는 존재.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누적되는 사람에 대한 가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 그만이다. 사람에 대한 가설은 매일매일 주고받는 대화와 카톡에 담겨있다. 이런 언어들을 진술statement이라 부르자. 한 사람이 읊어내린 진술은 누적되면서 결국 진실을 증언할 것이니, 판단judgement은 어디까지나 <주토피아>의 나무늘보 공무원처럼 느릿느릿하게 처리해도 좋을 일이라 여기게 된다.

살다 보면 판단이 진술을 앞지르는 일이 허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판단에 대한 나의 다짐이다.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태도, 판단에 신중하겠다는 태도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은 무척 고단한 일이나, 함부로 누군가를 재지 않고 느릿느릿하게나마 지켜보자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다. 사람이 만나다 어떤 진술로 말미암아 서로를 판단하고 만나서 이별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우리의 실체를 '바뀔 수 있는 무언가'라고 여기는 한, 언제 헤어졌냐는 듯 다시, 서로 기꺼이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 여길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교수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