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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Oct 29. 2017

지적 외로움과 동반자

똑닮은 것을 부비는데서 시작해 가장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취향에 닿는 일

혹시 "지적 외로움"을 느껴본적이 있으신가요?

왜 있잖아요, 가끔은 내가 방금 공부한 내용이나, 과제하다가 발견한 새로운 내용이나, 책을 읽고 든 생각이나, 내가 덕질해서 판 뭔가 학문적인 내용을 누군가에게 너무나도 말 하고 싶은데 말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요. 백석의 시를 읽고 든 감상이나, <또 오해영>을 보면서 느낀 자유주의와 대중문화의 상관관계라든가...
공대분들이라면 굉장히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고 느낀 희열 같은 느낌?

막 이런걸 학회나 동아리나 이런 공식적인 세팅 말고 그냥 친구랑 편안하게 수다떨듯이 신나고 재밌게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 저는 꽤 자주 느껴봤거든요. 그런 말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게 꽤나 슬프기도 하고. ㅠㅠ

오웰의 <1984>를 읽다보면 그 주인공도 자기를 고문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버리잖아요. 그냥 자기 생각을 들어주고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요. 저는 그 장면에서 스미스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어요. 지적 외로움이 계속되면, 연인이 없을 때 느끼는 외로움 보다 더 크게 사람을 힘들게 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고등학생 때에도 느꼈거든요. 그런 외로움. 어려운 수학문제를 저만의 풀이법으로 풀고 "야 있잖아 방금 내가 ~~해서 ~~~한 풀이를 발견했어!"라고 신이나서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나, 아님 선생님이 설명한 논리의 오류를 찾았을 때 그걸 신나서 같이 얘기할 친구가 있었으면 했어요. 그런데 이런 말 시작하면 "진지충"부터 시작해서 "노잼" 이라든지, 하여튼 범생이 이미지될까봐 차마 그런 사람을 찾는 티조차도 내지 못했어요.
대학 오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크게 변하는게 없네요. 아마 제가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겠죠?

저도 뭐 "그런 얘기"만 하고 싶고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가끔은 뇌없는 소리도 하고 싶고, 연예인 가십도 얘기하고 싶고 하지만. 가끔은 친구와 나란히 앉아서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인생의 방향이나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고, 영화 <아가씨>의 주제와 예술성을 같이 분석 해 보고 싶고, brexit가 사회/경제적으로 끼칠 영향에 대해 토론해 보고 싶어요.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재미있으니까.

저는 지금 그냥 Virginia Woolf 의 <Mrs. Dalloway>의 마지막 문장이 제게 남긴 여운에 대해, 이 책을 읽은 누군가와 절실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혹시 저랑 그러면서 놀 분 없으신가요?

그런 친구가 있으신 분들 정말 부럽습니다.


'지적 외로움' 그리고 '플라토닉 터치'


'지적 외로움'. 내게 이따금 찾아드는 지독하고 고약한 공백감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단어였다. 거기서 출발하는 화자의 독백 또한 내가 만약 올바른 지성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진작에 쓰고 싶었던 내용이었다. 2016년 여름, 나는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계정에 올라온 피드에 한참 서성였다.



여러분도 영화 <500일의 썸머>를 아시는지. 낯선 직장동료에게 "나도 그 음악을 좋아해요."라고 말을 건낸 '썸머'처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을 읽고 있는 썸머에게 다가간 '그 남자'처럼 말을 건낸다. 나는 이런 행동을 '플라토닉 터치'라 부르는 편인데, '플라토닉 터치'를 아얘 못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불만족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내가 부쩍 외로움을 느꼈던 건 대체로 '플라토닉 터치'와 얽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er_xx7Wmg8


존 레논은 죽기 전에 참명제이자 불멸의 맞는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러브 이스 리얼, 러브 이스 터치" 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사람. 감각하는 일상, 자극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서 사람이 살고 사랑이 싹튼다. 저마다 취향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리적 실감을 주고받는 일이다.


허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찾아들지 않으며, 찾아와도 삐걱삐걱 어긋나 버리는 바람에 대단히 서글퍼진다.

한창 저널리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을 때, 나는 학교 도서관에 동무를 찾는 포스터를 오려 붙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꺾여도,계속 고꾸라져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내게 남은 열망이므로.

똑닮은 것을 부비는데서 시작해,
가장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취향에 닿는 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인간관계다.

사실, 내가 이루는 모든 만남과 이별, 과정과 결과는 이런 생각을 토대로 이뤄지고 있다.
연애가 그렇고, 우정도 그렇고 '모든 친밀한 관계'는 '플라토닉 터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분명한 건 '시간이 약'이다.
충분한 준비를 거듭한 끝에 맞이하는 시간만이 이런 외로움을 해소해준다.

어쩌면 모든 쓸쓸함과 외로움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 친구와 전시를 보기 위해 종로 어귀에서 만났다. 타인과 무언가를 더불어 구경하고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푹 빠져드는 나의 오래된 애호습관이지만, 오늘처럼 거리에서 서너시간을 같이 걸어다니며 구경한 것을 토대로 대화를 꾸려나가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반나절 넘게 무언가를 감지하고 해석하고 그것을 교환하다보면 '한 사람의 정수'가 드러난다. 물론 여기서 '한 사람'은 '나'다. 헤어지자 마자 아쉬운 게 많았다. 여러가지 까닭이 있을텐데, 오늘은 자책을 좀 하고 싶다.

오늘 나눈 화두는 다음과 같다.

2015년 가을, 추계예대 졸업전시회에서
고향친구들에 대하여
파스타에 대하여
광장에 대하여
손수 밥을 지어먹는 일에 대하여
예술전시에 대하여
탐미주의자와 탐미주의작품
이성과 감성
메타 싱킹meta thinking에 대하여
미학적 체험을 예술로 구현하는 일에 대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 과 운동하는 예술
페미니즘 비평의 효용과 가치에 대하여
개인의 정체성에 대하여(소속/계급/사회)
뿌리내리는 삶 과 옮겨다니는 삶
청년문화란 무엇인가
공동체에 대하여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척 진지한 얘기만 나눈듯 하지만...차라리 진지함의 끝까지 갔다면 덜 부끄러웠을텐데.

머리를 떠다니는 추상적인 개념, 평소에 품어온 조각생각을 이어붙이다보면 추상적인 단어를 많이 쓰고 애매한 비유를 쏟아붇기 마련이다. 실력이 없으면 이렇게 담론談論이랍시고 꾸려내다 결국 말이 앙상해지고 볼품없어지는 거다. 그런 말만 잔뜩 흩날린 거 같아 부끄러움 열 스푼.

얄팍한 교양과 어설픈 상식으로도 가릴 수 없는 나의 알맹이는 어찌할꼬.

정말 오랜만에 공부하고 싶어진다. 예술에 대해서 미학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알았더라면 상대방이 내게 건낸 말을 정확하게 캐치해서 대화에 나서는 게 가능했을텐데... 내가 품은 생각을 훨씬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텐데...

나는 가끔 지나간 대화를 복기하며 스스로 말을 잘 꾸미지 못한 순간을 못내 아쉬워하고  남의 말을 잘 받아내지 못한듯한 느낌 또한 안타깝게 여긴다. 물론 이런 복기는 다음에 더 잘하기 위함이다.


2016년 겨울, 서울역사박물관,<서울 엘레지>

나는 지적 외로움이 이런 식으로 해소되는 것이라 믿는다.  각자가 더듬거리며 엮어온 화두를 서로가 서로에게 정확한 어휘로 번역해주는 시공간. 그런 시공간을 최대한 많이 몸에 통과시킬 것. 지적 외로움이란 비슷한 염려를 하는 개인이 만나 염려를 공유하는데서 부터 해소되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헤어지자 마자 메모장에 뭔가 끄적이고 싶은 기분.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 햄버거를 우걱우걱 뜯어먹으며 잽싸게 기록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우리는 지적 외로움을 제법 잘 해소하고 있는 편이리라.


외롭지 않으면 사람은 쉽게 황홀해진다. 여운이 오래가는 황홀함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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