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각색해보는 평범한 하루
오늘도 김조교는 어김없이 출근하자마자 과학실의 비품 재고를 확인해 컴퓨터에 반영한다. 혹은 과학실험 준비를 마칠 것이다. 김조교가 점심 무렵까지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면, '김조교 스스로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헤아리며 움직일 것이다. 5월 2일에도 그랬고 5월 13일에도 그러하며, X월 X일에도 그렇게 지낼 것이다. 김조교가 보낼 모든 근무지에서의 일상은 이런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벗어난다 하더라도 지극히 사소한 변주만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변주가 불러일으키는 일상은 분명 '사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김조교는 사소함을 사소하지 않게 하는 데 있어, 약소하나마 흥미와 재주를 안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 김조교에게 벌어진 사소한 변주 또한, '사소하지 않은 사소함'이라 할 수 있겠다.
김조교 자리 오른쪽에 있는 컬러 복합기는 성능이 제법 뛰어나다. 밖에서 뽑으면 한 장에 500원은 치렀을 고화질 컬러 프린트다. 그것을 제 맘대로 뽑아 쓸 만큼의 종이와 잉크가 김조교에게 주어졌다. 문구용품을 쓸 일이 많은 김조교는 풍족한 자원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나눠줘야 할 프린트를 뽑으며 프린트의 내용을 훑어본다.
「요즘에는 금요일에 체험학습을 가는구나!」
만약 김조교도 화성을 가게 된다면, 그는 거기서 반드시 바나나우유를 먹고 말 것이다. 어느 독립영화에서 본 남녀를 떠올리면서. 과학부 현장학습안내서에서 영화를 은유하는 김조교는 어깨를 저절로 떨었다. "일이나 하자 일." 김조교 두꺼운 종이를 뚫을 대형 스테이플러를 얻기 위해 1층 학생부실부터 5층 3학년 교무실까지 ㅡ은근히 운동효과가 좋아 김조교가 내심 좋아하는 잡일이기도 하다 ㅡ돌아다닌다. 과학부 가운데 있는 사각 테이블에 마주 앉아 뽑아낸 인쇄물을 스테이플러로 찍는 과학부장과 김조교. 과학부장이 먼저 말을 꺼낸다.
「김조교, 수원화성 가본 적 있나?」
「네 있습니다. 야구장 가던 길에 잠시 내려 구경해봤습니다.」
「화성은 우리나라에 있는 성에 아무것도 없는 걸 하나 갖추고 있어. 그게 뭔지 아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건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겠죠.」
「그렇지, 수원화성을 보려면 우선 남한산성 얘기를 해야 해.」
김조교는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속으로는 꽤 놀랐다. 과학선생님이라 과학에만 맞춰서 얘기할 줄 알았는데 꽤 넓은 분야를 아울러 수원화성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이 참에 김조교는 몇 가지 테마를 거들어 과학부장님을 깊은 대화로 끌어들이기로 작정한다.
「정약용 얘기를 꺼내셔서 하는 얘기인데 선생님 강진에 가보셨습니까? 국문과 답사 때 다산초당을 갔었어요. 정약용...」
「그때 테마가 뭐였어? 」
「교수님이 정하신 건데, 아마 남도 일대에 있는 문학여행이 테마이지 않을까 싶네요」
「나는 말이지... 어디 가서 뭘 보더라도 테마를 잡고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조교가 스테이플러를 세방 더 찍고 말을 덧붙인다.
「전 이렇게 어려서부터 현장체험 다니는 걸, 대학 가서도 써먹으면 참 좋다 생각하는데 말이에요...」
「후후... 그렇지.」
「여기서 몇 명이나 그렇게 될지 모르겠네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나한테 배운 애들은 잘 해~. 아까 스승의 날이라고 찾아온 녀석도 그런 녀석이야!」
김조교는 과학부장님이 말하는 걸 귀담아듣는 편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학부모의 상담을 -물론 원해서 듣는 건 아니지만- 엿듣거나, 복도를 지나가다 들려오는 과학부장의 말을 듣는 식으로 말이다. 과학부장님은 확실히 교사로서의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다. 뭐라고 규정하기는 섣부르지만, 아무튼 과학부장님은 김조교에게 독특한 태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이란 인상을 줬다.
몇 마디 더 섞는 가운데 과학부장님이 말한다.
「사람들은 날 더러 '까칠하다'라고 해.」
「... 제 생각엔 '해야 할 말을 제 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성격을 묘사하는 형용사를 쓸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요. 선생님께는 '까칠하다'는 표현 말고 다른 걸 붙이고 싶어요.」
과학부장이 피식 웃으며 답한다.
「이과는 명료해. 논문을 보더라도 거기서 쓰는 말은 분명해.」
「그런가요..ㅎㅎ 하긴, 과학은 약속된 기호 안에서 움직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 입으로 "까칠하다"라고 말할 정도면 과학부장님은 그간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까칠하다"는 말을 들어온 걸까? 그것은 정말로 과학부장 선생님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말일까? 김조교는 최근 1년 간, 부쩍 자주 들렀던 책방 주인에게 그저께 띄워 보낸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요즘 한창 제 머릿속을 뒤흔드는 주제는 바로 '피상'과 '휴머니티'거든요.
(*이 주제로 한창 생각하게 만든 텍스트는 윤동주의 '종시'라는 에세이인데 궁금하시면 한번 찾아보시길!)
싸장님께 그런 질문을 드린 맥락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겁니다.
『'나'를 두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깔때기를 들이대며 바라본다. '나' 또한 '남'에게 마찬가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서로 어떤 모습을 포개야 좀 '덜 피상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될까?
이를테면 사람들은 요즘 '정년'을 '글쟁이'로 많이 바라본다. 글을 쓰는 '나'는 분명 '나'지만,
내가 온 힘을 쏟아 쌓아가고 있는 '나'지만, '글'이란 결국 관념적인 구석이 많아,
'글'만 보여주고 사는 사람에겐, 대단히 피상적인 인상만 주고받는 인연으로 끝나게 되는 건 아닐까?
피상적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에겐 그대로 두어도 좋을 노릇이지만,
내가 간직한 휴머니티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나'를 포개야 나타나는 것.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겐 텍스트 바깥에 있는 나를 보여주고 싶다.
어쩐지 싸장님이라면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시지 않을까?
싸장님도 인디가수, 책방 주인 이외에 간직한 수많은 휴머니티가 있을 텐데,
드러나지 못한 휴머니티 때문에 속으로는 꽤나 속상하진 않으셨을까?』
과학부장님이 김조교에게 다가와서 하는 말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 김조교~ 1층 행정실 앞에 화분 있는데 그거 우리가 기르기로 했어요.」
「아~ 그러면 등사실에서 구루마를 가져오고...」
「워~워~워 자기야, 지시를 들으면 일단 끝까지 듣는 게 좋아요. 일단 들어봐요~ 그렇지. 구루마를 들고 1층에 내려가서...」
또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옆 자리 물리선생님한테는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넨다.
「자~ 감기약 받아요 형, 거 뭐 코를 훌쩍거리고 그러나.」
과학부장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는 절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말하고 싶은 게 있고 드러내고 싶은 게 있으면, 뜸 들이지 않고 내지른다. 김조교가 과학부장을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점에 있지만 말이다.
김조교는 과학부장의 드러나지 않은 휴머니티에 대해 생각한다. 그와 하루하루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시간에 걸맞은 과학부장의 휴머니티를 들여다려 보려 애쓴다면, "까칠하다" 말고 과학부장을 말할 수 있는 형용사를 더 많이 끄집어낼 수 있지 않겠냐고. 또한 학교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지 않겠냐고. 김조교는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인 모습과 인간됨이 비례하는지 반비례하는지 따위를 생각하며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이렇듯 나는 요즘 이런저런 형식으로 제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을 타 , 띄어쓰기를 거른 채, 요절한 천재 작가를 흉내내기도 하고, 그날그날 찍은 사진 하나하나에 이런 생각과 저런 의미를 붙여보기도 한다. 오늘은 '소설'처럼 써봤다. 아니지, 소설이라 하기엔 좀 민망하다. 그냥 3인칭으로 관찰하듯 서술하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일상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완벽하고 정확하게 옮겨 썼다 말할 수도 없다. 분명 오늘의 기록은 각색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다양한 '형식'을 활용해 일상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의 '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과정' 안에서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각별하다 생각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엔 일상의 '과정'을 관조할 시간적 상황적 여유가 생긴 까닭에, '과정' 안에서 '과정'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정' 안에서 '과정'을 기록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나, 아주 드물었다. 우린 대체로 '결과'가 나오고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던가?
때 마침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知音'K'가 비슷한 요지의 글을 올려준 덕에, 생각을 넓게 키워 간다.
나는 이미 두 번의 휴학을 경험했다. 앞선 두 번의 휴학도 분명 의미 있었다. 다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세월'이요, 결과가 나온 뒤에 해석하는 '흘러간 과정'일뿐이다. 또한 '남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모든 게 '결과'를 위한 과정이었다. '돈'이나 '스펙'을 위한 과정이었다.
지금 보내는 세 번째 휴학은 '과정'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과정' 안에서 '과정'을 바라보는 시간이다.'결과'가 나온 뒤에 '과정'을 말하는 건 지극히 쉽다. '결과'를 토대로 '과정'을 포장하게 된다. '결과'란 대체로 잘 나온 것을 부각하며 그럴싸하게 포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정' in '과정'을 기록한 것과 '결과' after '과정'을 기록하는 것은 기록이라는 차원에서는 같지만, 질과 진정성에 있어서 서로 크게 어긋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우리는 대체로 '결과'에 쫒기 우듯 살아가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러다 보면 '과정'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많다. '과정' 안에서 '과정'을 기록하다 보면 그런 방황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과정' 안에서 '과정'을 돌아보는 일로 우리는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좀 더 탁월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과정'에서 '과정'을 기록하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했을 때, "그건 바로 나 자신이오." 라 당당하게 답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에게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자유'로운 법이고, 주어진 자유 안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평생 간직하고 살 '추억'과 '인연'이 삶에 흘러넘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일상 안의 '과정'을 제 때 들여다보는 게 가능해진 現라이프 패턴에 지극히 감사하며 지내고 있다. 내가 누리는 상황 자체가 커다란 '위안'이자 '안심'이자 '용기'가 되고 말았다. 당장 일 년 정도는 'X 같은 토익'따위에 몰두하지 않아도 되고 '보여주기용 스펙'을 쌓지 않아도 되는 상황. '개인'으로서 마땅히 키워야 할 휴머니티. 이를테면 '애인'과 '가정'과 '공동체'를 책임질 수 있을 건강한 '신념'과 강한 '의지', 그리고 강인한 '체력'. 그리고 디테일한 '배려'와 적재적소에 발휘할 '센스'까지! '이 모든 것'을 차근차근 기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책에서 얻는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습관과 행동을 예리하게 포착했을 때 나오는 '휴머니티'이기도 하다. 이렇듯 '선물처럼 주어진 현실'이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만족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동기motivation가 되어 활활 불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