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시적으로 보는 관점의 어려움과 그 성취에 대하여
프란츠 하이켈하임은 미국에서 서양, 특히 그리스 로마 역사의 학파를 주도한 사람입니다. 역사서라고 하면 사실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 역사가에 따라 선택되는 사실들이 다르고, 그 사실들을 통해 도출되는 결론은 더더욱 다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하이켈하임이 쓴 이 책은 대표적 학자가 로마에 대해 어떠한 사고를 했는지 엿보게 해주며, 역사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게 도와줍니다. 더불어 에드워드 기번, 몸젠 등의 역사가들이 집필한 책들과 비교해보면 시대와 개인에 따라 동일한 역사가 어떻게 다르게 쓰여질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게 해줍니다.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그리스 로마 문명은 서구사회에서 나아가 현대 문명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 로마 문명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세우는 기본 작업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로마사를 인간 보편으로 생각하게 될 경우 서구중심주의에 매몰될 수 있으며, 현대의 맥락에 맞추어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선 제가 로마사를 공부하며 가졌던 감상을 적어보겠습니다.
로마는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가진 나라입니다. 서로마는 기원전 753년에서 기원후 476년까지 이어졌으며, 기원후 1453년까지 존속한 동로마를 합할 경우 2천년이 넘는 시간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제패한 기원전 275년 이후 강대국의 지위에 있었으며, 끝내 지중해를 자신의 내해로 거느릴 정도로 세계제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제국들의 전성기가 길면 2백년정도에 남짓한데 반해 로마는 몇 곱절의 기간의 전성기를 유지한 것입니다. 한 나라가 어떻게 오랜 기간 활력을 유지했는지를 공부할수록 로마에 대한 놀라움은 커집니다. 로마에 대한 제 관심의 대부분은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제가 생각해본 로마의 탁월성에 대해 서술해보겠습니다.
먼저 로마는 외적으로 열려있었습니다. 이는 로마의 정치체제가 왕정, 공화정, 원수정, 전제정으로 변하는 동안 한결같이 유지되었습니다. 로마가 아직 작은 씨족단위였을 때에도 새로운 인구 유입은 꾸준히 있었고, 이는 기원전 504년 클라우디우스 씨족 전체가 로마로 집단 이주한 사건 이래로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새로운 구성원이 집단으로 유입이 되는데, 기존의 구성원들과 큰 충돌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로마의 핵심적인 귀족 가문이 되었고, 로마 공화정의 최고 지위 중 집정관과 재무관 등의 자리에는 노부스 호모라고 불리는 신흥 가문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황제들의 경우에도 아랍인 황제 필리푸스, 스페인 및 아프리카 출신 황제들이 등장하는 등 지역과 민족들에 열려있었습니다. 이러한 통합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의 피보호인 관습과 로마의 핵심 가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는 직계가문 이외에도 그들의 세력권에 평민들과 노비들을 포함시키는 피보호인 관습이 있었습니다. 피보호인은 로마 건국 초기부터 내려오던 관습으로, 로마가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을 당시 씨족들이 세력을 확장시키고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목적을 가졌습니다. 세력확장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씨족들은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피보호인들을 늘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관습이 계속되어 로마의 귀족들도 지역과 인종에 상관없이 피보호인들을 늘리게 되었습니다. 피보호인들은 씨족 내에서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였고, 귀족 가문에 약간의 노동력과 공물을 제공하는 대신 개인적 보호와 부수적 혜택을 받았습니다. 귀족들도 피보호인들을 통해 정치 권력과 명예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피보호인의 경쟁적 확장이 금해진 이후에도 그 정신은 남아있어 제국은 국가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핵심 가치들은 아욱토리타스, 글로리아, 디그니타스입니다. 이들은 모두 로마 초기부터 내려져오던 가치들로, 아욱토리타스는 authority, 글로리아는 glory, 디그니타스는 dignity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로마는 이러한 가치들이 전쟁, 정치에서의 공적으로 얻어지고 세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인종과 지역에 상관없이 자신의 아욱토리타스와 글로리아, 디그니타스를 보여주는 사람은 평민에서 귀족으로, 노부스 호모에서 탄탄한 귀족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 핵심 가치들로 인해 로마는 국가의 규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정쟁이 있었더라도 외부의 위기가 닥칠 경우 효과적으로 나라를 규합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스스로의 모순을 성공적으로 내부에서 해결하였습니다. 라틴 연맹의 분열, 평민과 귀족층의 갈등, 식민시와 로마간의 갈등 등 로마는 결코 내부적으로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 로마는 무력과 평화, 외부 조건 등을 이용하여 내부적으로 갈등을 해결하였습니다. 라틴 연맹이 로마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었을 때엔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평민층이 군대를 돌려 농성하였을 땐 정치 참여의 권한을 확대하였으며, 식민시와 로마간의 갈등이 일어났을 땐 포에니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고루 분배하였습니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서서히 확대하는 정책을 펼쳐 로마와 비로마의 차이를 줄이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충하였습니다. 로마 시에만 한정되던 로마 시민권은 이후 라틴 연맹, 이탈리아 전체와 식민시, 로마 제국 전체로 확장되며 특권을 과감하게 확대하고 제국을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을 주었습니다.
로마가 외적, 내적으로 모순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였을 경우, 정치체제를 바꾸어 나라의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왕정의 폐단이 드러나자 귀족연합은 왕을 축출하고 1년 임기의 집정관을 도입하였으며, 이후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1년 임기의 총독과 집정관으로는 넓은 영토를 통치할 수 가 없게 되자 여러 세력자들을 필두로 공화정을 원수정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후 원수정의 효력이 다하고 이민족의 침입이 증가하며 제국의 생산력이 감소하자 전제정으로 바꾸어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을 지속시킬 원동력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로마의 정치체제는 바꾸었으나, 로마의 핵심가치와 관습 등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문화의 큰 마찰 없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후로 완전한 전제정이 확립되고 로마의 가치들은 사라졌으나 그 이전까지 로마의 관습과 정책들은 개인의 탁월함이 발휘된다면 그에 걸맞는 명예와 신분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노예제도에도 적용이 되어 주인들은 성실한 노예를 자주 해방시켜주었고, 해방노예들은 능력을 토대로 귀족에 걸맞는 경제력과 명예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정치와 군사, 경제는 현대에도 영향을 주는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로마의 원로원과 원수정, 지방자치제 등 많은 면을 벤치마킹 하였고 여기에 현대식 민주주의를 결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군사 훈장, 혜택과 고위공직자들의 마음가짐 등은 로마의 가치들을 답습하였고 세계제국과 비슷한 위치의 나라가 되어 동맹 보호와 군대의 전략적 거점 주둔 등 국방에서도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본위제를 통하여 자신들의 주 산물인 은을 토대로 동방, 인도, 중국 등과 교역을 주도해 나간 점은 달러 기축통화를 통해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점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라틴어를 통한 제국 공용어, 트라야누스 황제부터 시작된 결손가정 지원, 가난한 속주에의 구호정책과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이어진 제국 기금 조성 등은 현대의 국가들이 왜 비슷한 정책들을 시행하고 발전시키는지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이외에도 도량형, 가도를 통한 체계적인 도로망은 아직도 사용되는 등 우수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마냥 탁월한 점으로만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대다수의 정책들은 현대에 들어 정교해졌으며 로마 시대에는 보통 원시적이거나 미약한 형태로 존재하였습니다. 인권 개념도 희박하여 해방노예를 제외한 노예들은 귀족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었고, 여성들의 생활수준도 귀족을 제외하면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일부 최고권력자들의 무능함은 나라 전체에 영향을 주었으며 점차 중세의 봉건제도로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도 로마를 위대함만으로 바라보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하며, 한 나라를 여러 관점으로 조망하는 능력에 대해 역설합니다.
공교롭게도 저자가 바라본 로마의 쇠퇴기에 대한 부분이 이런 점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역사에 대해 알아보며 빠지기 쉬운 위험성은 역사를 하나의 인과관계로만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가 직선적인 흐름으로 흘러가지 않으며, 특히 시간적으로 길고 규모가 큰 변화일수록 종합적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저자는 로마의 쇠퇴기에 대한 주장들을 하나씩 검토해보는데, 이 과정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종합적인 원인을 살펴봄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흔히 접하는 로마 제국의 쇠퇴 원인으로는 게르만족의 침입과 그리스도교 등이 있으나, 사실 이들은 모두 부수적이거나 근거가 없는 주장들입니다. 우선 게르만족의 침입은 대략 200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는데, 제국은 이 기간에 생산성의 저하를 겪었으나 군사력을 유지할 수준을 유지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경우 종교와 제국 행정의 합일이 일어나 종교가 제국을 쇠퇴시켰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대신 저자가 주장하는 로마 제국의 쇠퇴 원인은 로마의 지리적 구조와 인력 부족, 경제적 취약성과 과학의 저급한 수준, 불안정한 정치, 귀족적 가치관입니다. 지나치게 긴 국경선은 막대한 군사와 자원을 필요로 하였고, 국경선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에 적은 자원을 분배할 수 밖에 없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인력 부족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었고, 귀족들의 사치품 소비는 은의 유출을 불러 일으켜 경제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과학의 발전도 일어나지 않아 경제 성장이 일어나지 않았고, 제위 쟁탈로 인해 점차 정치가 불안정해지고 경제도 함께 약화되었습니다. 귀족적 가치관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실질 학문들 대신 수사학에 몰두하게 하였으며 명예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정치 분쟁을 더욱 증가시켰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요소들이 개별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 나라의 발전과 쇠퇴에 대한 종합적인 조망이 가능해진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대개 역사를 단편적으로 알게 될 경우 한 두 가지 원인들만을 알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한 국가의 진행 과정 중에 발생하는 모순점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한계만을 드러내는데 저자가 말하는 부분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