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 불멸의 역작 -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게임은 무엇인가?
이 게임은 전설에 따르면 모 서울대 교수가 “철학의 집대성”이라고 극찬하며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플레이를 권했던 게임이라고 합니다. 사실 여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1999년 블랙 아일 스튜디오가 제작한 게임입니다. 우리가 현재 플레이하고 있는 CRPG게임의 기념비가 된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게임 내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아 스토리를 진행해나가는 방식을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CRPG는 Computer Role Playing Game의 약자로, 기존의 보드게임으로만 존재했던 RPG를 컴퓨터에서 구현시킨 게임을 의미합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이전에도 발더스게이트 1이라는 최초의 CRPG 게임이 있었으나, 발더스게이트 1에 비해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가 좀 더 RPG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어 CRPG의 본격적인 시초라고 보기도 합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게임 회사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한 게임입니다. 현재 게임 제작 사회에는 상업적 목적을 바라지 않고 소규모의 투자를 기반으로 하는 인디 게임 회사와 ‘비디오 게임 아티스트’가 많아졌으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게임은 대형 게임회사들이 제작하고 판매하는 시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특징은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서도 드러납니다. 우선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게임 자체가 플레인스케이프라는 캠페인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었고, 대대적인 패키지 작업을 거쳐 판매를 시작했으며 다른 상업적 게임에서 여러 요소들을 따왔습니다.
이렇게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가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게임이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이 게임을 기초로 하여 점차 비디오 게임의 예술화 가능성이 대두된 이유는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가 그 당시의 비디오 게임의 단순한 연장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향후 실험적 게임들과 소위 예술적 게임들이 단순히 상업적 비디오 게임의 연장선인지, 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꾼 변화의 물결인지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에 대한 서술은 잠시 미뤄두고 우선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주요 특징에 대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시나리오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게임입니다. 스토리가 없는 게임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스토리와 그 서술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스토리와 그 서술에 큰 비중을 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크게 기술적 문제와 제작진의 심리적 동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게임은 대부분 CD나 플로피 디스켓으로 유통되었는데, 어떠한 저장장치도 많은 분량의 목소리나 게임 인물들의 동작, 영상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1997년 컴퓨터 게임 역사상 최초로 3D 그래픽을 사용한 RPG 게임 파이널 판타지 7은 용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4장의 CD으로 출시했는데, 4장의 CD로도 제작진이 의도한 컨텐츠를 모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게임의 볼륨을 늘려주면서도 용량을 적게 차지하는 텍스트의 양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 수록된 텍스트는 총 80만 단어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보다 더 많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용량의 CD에 엄청난 양의 텍스트가 들어가게 되니 자연스럽게 게임의 영상과 등장인물의 동작이 적어지게 되었고, 이렇게 게임의 볼륨을 크게 늘릴 수 있었지만 그 반대로 비디오 게임만의 장점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게임의 대다수 볼륨을 텍스트에 할당한 이유는 제작진이 게임 제작에 상업적 게임 이상으로 공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 제작진은 여러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기존의 RPG들과 비슷하게 영상과 텍스트, 사운드의 비중을 맞추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CD 안에 이러한 요소들의 비중을 조절하여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이라는 원작이 있었고, 제작진의 원작 고증에 대한 열망과 차별화된 스토리 전개와 경험에 대한 열망이 모두 강했습니다. 그 결과 플레인스케이프의 원작 작가가 게임 제작에도 참여하였고, 여타 RPG와 게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콘텐츠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줄거리는 짧습니다. 주인공, 플레이어는 어떠한 기억도 없고 심지어 이름조차 모릅니다. ‘이름없는 자’는 자신을 소각하려는 간수들을 피해 달아나고 자신의 기억과 이름을 찾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줄거리가 매우 짧은 이유는 이 게임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그 결과와 성격이 매우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투를 선호하는 플레이어라면 ‘이름없는 자’는 전사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전투 대신 대화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라면 ‘이름없는 자’를 달변가로 만들 수도 있으며, 이 둘을 골고루 분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워낙 선택지가 방대하고 결말도 여러 개가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마다 선호하는 줄거리와 ‘이름 없는 자’의 성격이 모두 다릅니다. 여기서 이 게임이 철학적이라는 평을 받은 이유는 이 게임을 관통하는 주제가 개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플레이어는 ‘이름없는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이는 게임을 진행하며 자기 자신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게 합니다. 자신의 흔적을 찾아다니지만 ‘이름없는 자’는 자신의 기억들이 진실인지, 진실이라면 어떠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름없는 자’의 정체성을 연결해주고 이름을 찾아주는 역할은 플레이어의 선택들에 달려있는데, 결국 플레이어의 선호와 성격, 플레이어의 정체성이 ‘이름없는 자’의 정체성에 덧입혀지게 되고 그 일부를 이루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며 ‘이름없는 자’의 모험에 자신을 이입하며 해골, 파로드, 침묵의 왕 등 자신에 대해 알고 있거나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등장인물을 찾으며 자신을 정립합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가 다른 RPG게임들에 가지고 있는 차별점으로는 막대한 텍스트를 통한 시나리오의 다양성과 중세와 신화 대신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기치에 내건 컨셉이 있습니다. 또한 게임의 큰 규칙이나 점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름없는 자’의 이름을 찾는다는 목적과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게임이 여타 예술의 재현에 불과한 상업적 제작물인지, 독창적 예술의 분파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게임이 규칙, 점수, 목적, 결과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하나의 요소라도 부족할 경우 게임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예술의 재현에 불과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와 게임은 예술의 재현이거나, 아니면 완전한 상업적 제작물로 간주됩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여타 게임과 달리 규칙과 점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소설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플레인스케이프가 가지고 있는 시나리오의 다양성과 철학적 메시지는 단지 여러 심오한 소설들을 합친 재현물의 특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저 이버트는 게임이 타 예술과 달리 제작자 순응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게임 내에 선택지가 다양하고 그에 따른 결말의 종류가 많다고 하더라도 결국 제작자가 의도한 플롯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저 이버트는 게임이 제작자가 의도한 사고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자유로운 사고와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가 가능한 예술과 다르다는 입장을 가졌습니다. 결국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철학적인 메시지도 제작자에 의해 왜곡된 메시지일 뿐이며 진정한 제작자와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도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게임을 고정적인 정의에 비추어 생각하고, 게임이 현재 발전하고 있는 방향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현재 게임이 여타 예술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차이점은 플레이어의 선택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게임이 규칙, 점수, 목적, 결과의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의 게임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큰 규칙이 없이 플레이어에게 점점 더 많은 자유도를 제공하려는 게임적 시도는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 게임의 플레이어의 자유도는 기존의 게임에 비교를 불가할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규칙과 점수가 없어도 게임의 진행과 게임을 즐기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이를 토대로 규칙과 점수가 없이 플레이어에게 기존 예술과 다른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구현되었습니다. 기존 예술에도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만, 게임은 보다 넓은 상호 작용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그 가능성이 현재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기존 예술과 다른 심미적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인은 사진이나 그림, 영화 등을 통하여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에 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르네상스의 이탈리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청각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나는 소리와 대화가 어떠하였는지, 더 나아가 냄새와 진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심미적 경험을 개인에게 더 가까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인과 이야기하며 자신의 반응을 결정할 수 있고 어떤 시각적 경험을 할지, 어떤 청각적 경험을 할 지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결정과 상호작용은 개인을 기존 예술보다 더 심미적 경험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제작자 순응적이라는 비판도 현재 게임의 추세와는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마인크래프트’를 필두로 하여 현재 게임들은 제작자와 플레이어를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작자가 게임의 큰 틀만 제시한다면 플레이어들은 컨텐츠를 모두 즐길 수도 있고, 만약 자신의 경험이 불완전했다면 플레이어가 직접 자신의 컨텐츠를 게임에 추가할 수 있습니다. 제작자와 플레이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모두가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임 제작이 시간적으로 종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게임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하지 못한다는 주장과, 사회 참여적이지 못하다는 주장은 게임을 대형 게임사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점차 발달하고 있는 인디 게임과 ‘게임 아티스트’들의 증가는 게임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밝히려고 노력하는지, 게임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 참여적인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이브 온라인’에선 무정부상태일 때 인간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규합하고 어떻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어떻게 윤리와 규범이 정립되는지 알아볼 수 있고, ‘반교’를 통하여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역사를 기억하게끔 하려는 제작자의 의도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결국 게임은 제작자뿐만 아니라 플레이어의 의도와 경험을 포함하며 컨텐츠 그 자체에 예술적으로 무사심하게 관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임을 불완전하다고 바라보는 비판적인 견해들은 대부분 상업적 게임들이 지배하는 산업 구조와 짧은 역사로 인해 영화와 다른 독립적인 요소들을 가지지 못한 한계를 지적합니다. 물론 게임은 하나의 산업이고, 대다수의 게임 산업은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업적 목적을 가진 게임들도 존재하는 반면 분명히 그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게임들도 제작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업적으로 제작되는 음악과 영화도 존재하고, 반대로 예술성에 몰두하는 음악과 영화도 존재합니다. 사실 상업성만을 가지는 예술형태도 적고, 예술성만을 가지는 예술형태도 적으며, 대다수의 예술형태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가지기에 게임도 마찬가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게임이 아직 영화에 독립적인 요소를 많이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게임만의 독자적인 컨텐츠도 일부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게임이라는 형태가 좀 더 성숙해지면 게임도 예술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