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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질 들뢰즈 - 니체와 철학, 1주차

차라투스트라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가

도입


<니체와 철학>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니체 철학을 해설한 책이다. 일반적인 해설서는 주석의 동어 반복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으나,들뢰즈의 해설서는 다르다. 들뢰즈는 <니체와철학>에서 해설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 특히제 3세계, 무풍지대로 대표되는 프랑스 철학의 도입을 시도한다. 그는 니체 철학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은 니체의 말에 의하면 비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이다. 그렇다면 니체와 들뢰즈는 어떤 관계인가? 이 질문은 <니체와 철학>에서 어디까지가 니체이고, 어디까지가 들뢰즈의 견해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필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와 철학>은생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생성은 들뢰즈의 니체-생성이자 니체의 들뢰즈-생성을 모두 포함한다. 들뢰즈가 니체 철학을해설하면서 자기 자신의 철학의 진화를 이루고, 니체가 들뢰즈를 만나며 자신 철학에서 잠재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드러낸다. 이 두 생성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생성 블록을 이루며, 하나의 유일한 생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니체와 철학>에서 니체와 들뢰즈의 구분은 허무주의적이다.


1장 – 비극


니체의 일반적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데 있다. (의미는 Sens라는 프랑스어로, 들뢰즈에 따르면 명제로 표현된 것, 복합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것, 순수 사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의미와 가치의 니체 철학은 비판이다. 그런데 현대 철학에서 가치론은 신순응주의에 그쳤으며, 니체적 영감조차 여기에 순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가치의 개념은 비판적 전복을 함축하고, 평가와 평가의 관점을 전제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가치 자체가 아니라 가치가 전제한 평가, 창조의 문제이다. 평가는 상응하는 가치들의 미분적 요소에 의해 정의된다. (고귀함과 저속함, 우아함과 비루함이 미분적 요소의 예시) 비판철학에서 니체는 이중적인 투쟁을 한다. 비판으로부터 가치를 박탈하는칸트,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의 노동자에 반대하고, 객관적 사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며 가치를 비판하거나 존중하는 공리주의자들에게도 반대한다. 현재 철학에서 가치를 박탈하는 부류와 가치를 부여하는 부류 모두를 반대하며, 니체 철학은 두 가지 방향을 모두 새로이 창조하려고 한다.


그 시도로 그는 계보학을 대입한다. 계보학은 가치들의 기원을 의미할 뿐 아니라 기원 속의 차이나 거리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계보학적 비판은 현상을 해부하여 의미를 밝히는 적극적 비판이다.니체는 현상과 의미의 관계로 철학을 바라보며, 일반적으로 한 사물의 역사를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의 연속이고, 독점하기 위해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으로 해석한다. 동일한대상, 현상은 소유하는 힘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며, 의미는 따라서 복합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니체의 복수주의를 고려해야 한다. 의미의 변주를 인정하면, 의미가 다수가 아닌 그 어떤 사건, 현상,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은 <이것, 저것, 여기, 지금>의 동어반복이라고 복수주의를 폄하하였으나, 복수주의를 통해 각각의 의미들의 변주들이 평가되는 철학의 가장 고귀한 해석이 파생된다. 여기서 본질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그것을 독점하는 힘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Homme을 찾아라)


새로운 힘이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쓸 때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철학은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만 하며, 새로운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할 때 자신의 가면을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계보학의 주된 문제는 기원 자체가 아니라, 계보학으로 이해된 기원, 즉 기원으로부터의 관계이다. 계보학에서 자신의 가면을 정복함은 계보학이단지 해석에 그치지 않고 평가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계보학을 구성하는 대상들은 자체로 외관이 아니 라힘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들이 힘에 따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모든힘은 다른 힘과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 거리는 미분적 요소이다. 여기서 다른 힘과 관계를 맺는 어떤 힘을 의지라고 한다. 의지는 관계이며, 거리, 즉 미분적 요소이다. 니체 철학에서 의지는 대상에 작용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다른 의지에 작용한다. 의지는 명령할 수도, 복종할 수도 있는 복합적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동일성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했는데, 생성자와 파괴자가 같은 쇼펜하우어의 의지론은 자기 파괴에 이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니체의 의지 철학을 이기주의와 동일시하는 행동이다. 니체의 의지는 자기중심적인 관계의 규정을 논함이 아니라 계보학에서의 기원의 관계, 서열의 관계를 위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복합적 현상인 한에서 사물 속에 표현되어있는 힘들의 서열이다)


니체 철학에서 힘이 다른 힘을 대상으로 취한다는 사실은 변증법의 외관과 유사하다. 니체 철학의 복수주의는 정과 반의작용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니체의 초인과 가치 전환은 변증법과 정반대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과 자신, 자신이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고 이 차이를 긍정한다. 또한 이 관계에서 니체 철학의 핵심 질문인 <의지는 무엇을 원하는가?>와 <이 사람은 무엇을 원하고 저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가 등장한다. 의지는 목적, 동기가 아니며 의지가 원하는 바는 오히려 자신의 차이를 긍정함이다. 반면 변증법은 자신이 아닌 모든 바를 부정하고, 그 부정을 자신의 현존의 원리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비-자아에 대한 부정은 니체의 자아 긍정과 대립되는 노예도덕이다.


그런데 니체의 저작 <비극의 탄생>에서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아폴론은 개별화의 원리를 신성시하고 고통을 지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원초적 통일로 돌아가고 고통을 우월한 쾌락 속에서 해소시킨다. 따라서 비극은 원초적 모순과 디오니소스적 해결, 그리고 극적 표현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가 긍정적인, 긍정하는 신으로 제시됨을 볼 때, 디오니소스는 고통의 해소에 그치지 않고 고통의 긍정과 고통의 쾌락으로의 전환을 이룬다. <그는 개별화의 고통을 재생한다기보다 성장의 고통을 긍정한다> 디오니소스의 긍정적 성격은 삶의 우월한 해결이나 정당화를 대신하는 삶의 긍정이다. 그리고 니체가 이후에 발견한 것은, 보다 더 심각한 대립이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퇴락을 의미하며 삶을 관념에 의해서 판단하고, 관념을 삶에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도 <음악을연구하는 소크라테스>로서 약간은 디오니소스적이기에 니체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반테제,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반테제를 참된 대립으로 대체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대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와 예수는 고통의 긍정과 정당화라는 점에서 동일하면서도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진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삶 속에 고통이 있음은 삶을 부정의한 것으로, 끊임없이 본질적인 부정의를 갚아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죄인이다> <삶은 죄인이기 때문에 고통 받아야만 한다> 이는 소위 기독교적 허무주의를 정의한다. 기독교적 기쁨은 고통의 해소, 삶의 해소를 의미하고, 신에게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 광기이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삶을 본질적으로 정의롭게, 스스로 정상화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고통조차 긍정한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대립이 삶의 긍정과 부정으로 전개된다. 예수의 관점에서 <삶은 성스러움으로 인도하는 길이어야만 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의 관점에서 <현존은 더욱이 엄청난 고통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외치는 가치 전환, <모든 화해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비극>이 드러난다.


여기서 비극을의 학적인 처방이나 고통, 공포, 연민의 도덕적 해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극은 긍정 그 자체이며, 기쁨의 미적 형태를 가리킨다. <영웅은 명랑하다. 바로 그 점이 지금까지 비극의 저자들이 회피해 왔던 것이다> 우리를 경쾌하게 만들고, 춤을 가르치고, 놀이의 본능을 부여하는 것은 디오니소스, 차라투스트라의 임무이다. 그는 무수한 기쁨들의 신으로 불린다. 니체에 의하면 현존의 의미포함성은 철학의 가장 고귀한 의문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현존을 정당화해야만 하는,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따라서 자신들이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속죄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거인 족의 이미지에 죄를 씌운 그리스인들에게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만들진 않았는데, 거인 족의 개념엔 책임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잘못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신들의 몫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네 잘못이다>에서 <그것은 내 잘못이다>로 나아가며 현존에 책임성을 부과하였다. 니체는 이에 반대하며 현존의 무책임성에 긍정적인 의미를 제공하고 과거에서 현존을 독립시킨다.


디오니소스는 결백, 복수성의 결백, 생성의 결백과 현존의 결백을 발견한다. 디오니소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현존을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미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생성만이 존재한다. 여기서 니체 철학의 영원회귀가 모습을 드러낸다. 생성만이 존재한다면 생성되고 있는 것과 생성 이전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니체철학은 모든 것이 생성에서 다시 돌아온다고 말한다. 되돌아오기, 생성 이전, 생성되는 것 모두 생성 그 자체의 존재이다. 생성의 긍정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니체는 생성의 긍정을 주사위 던지기에 묘사한다. 주사위가 던져지기 전 주사위 자체는 우연의 긍정이다. 주사위가 던져진이후 그것들의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조합 자체는 주사위들에 의해 긍정된다. 필연은 우연의 파괴 대신 우연의 조합, 긍정, 놀이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바람직한 조합을 위해 인과성과 확률성을이용하고, 조합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주가 무목적적이며 인식할 원인이 없듯 놀이 자체에도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운명적 조합, 단 한 번의 모든 우연, Amor fati, 운명에의 복종>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이유도 우연에 기반한다.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유일한 예언자도, 가장잘 예언한 예언자도 아니다. 두 번째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형이상학에 도덕을 도입했고 도덕의 신비화를 고발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우연의 긍정을 말했다는 점이다. 주사위 던지기에서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하면 조합의 존재와 현존의 부정,허무주의로 이르게 된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복수심이라고 부르고, 복수심과 가책, 원한은 인간의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는 원칙을 세운다. 허무주의는 개인의 심리 성향으로 환원되지 않고 역사, 이데올로기, 형이상학적 구조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이 모두를 포함하는 요소이다. 심리학, 역사,형이상학, 도덕의 본질을 구성하는 힘이다. 이는인간 정신의 계보학적 원리이고, 따라서 허무주의에 반대하는 니체는 인간 계보의 끝, 인간의 전복을 주장한다. <우리는 금욕적 이상 외의 다른 이상이없다> 그의 새로운 사유 방식은 긍정적 사유, 그리고 미래와 과거의 결백을 믿음, 삶 속의 의지를 긍정하는 사유, 영원회귀의 믿음이다. 따라서 니체주의자들은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허무주의의 기준 하에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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