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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질 들뢰즈 - 니체와 철학, 2주차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2장 - 적극적인 것과반응적인 것


니체 철학은 신체와 몸을 강조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나타났듯, 몸은 개인의 전부이고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기존의 철학은 몸을 비하하고 그 구성원이자 하위 존재인 의식과 정신만을 선호해왔다. 니체에 이르러야 이를 전복하는 시도가 등장한다. <우리는 의식이 겸손해지는 시기에 도달한다>


 의식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니체의 의식론을 프로이트와 병치시킨다. 자아의 영역은 외부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 곳이다. 그리고 자아는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표현되는 자리이자 상상의 영역, 정체성과 자기애를 형성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니체는 의식을 노예라고 비판한다.그에 의하면 의식은 결코 자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이지 않은 자신과 관련한 어떤 자아의 의식이다. 여기에서 니체 철학은 중심을 의식에서 상위 존재인 신체로 옮긴다. 니체에게 신체는 <긴장 관계 속에 있는> 힘의 양들이다. 힘은 물리적 개념도 아니고 관념에 불과하지도 않다. 힘의 모든 관계는 화학, 생물학, 사회, 정치의 영역에서 신체를 구성한다. 신체는 우연의 산물이고 힘의 본질이다. 힘들이 모여있다고 신체가 구성되지 않으며, 이들이 모여 관계를 이루어야만 한다. 여기서 하나의 신체를 지배하는 힘은 적극적이며, 지배 받는 힘은 반응적이다. 그리고 이들의 차이, 미분적 요소가 서열이다.


 반응적힘들은 구조와 목적을 보장하고 삶의 보존과 적응을 수행한다. 이들은 공리적이다. 반대로 적극적 힘들의 특징은 진술하기 어려운데, 이들이 주로 무의식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은 반응적이며 아폴론적인 개별화를 구성한다. 반면 무의식은 적극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도취, 합일을 나타낸다. 무의식의 의식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볼 때,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인 힘들은 신체를 우월한 것, 의식적 방식보다 우월하도록 만들고 권력을 지향하도록 만든다. 힘들은 양이고, 그들의 성질은 적극적이고 반응적이다. 이는 양적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양적 차이는 질적 차이에 상응하며 양 자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니체가 힘들의 미분적 요소를 관계로 말한 것을 보았을 때, 힘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힘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는 힘 자체와는 다르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힘들의 양적 차이는 흔히 생각하는 숫자들의 형태가 아니다. 과학은 양적 차이를 양과 동일시하지만 이는 반응적인 시도이다. 모든차이, 관계를 몰가치적인 양으로 환원함으로써 과학은 현존을 비하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니체의 영원회귀를 동일자의 사유로 치환한다. 관계성이 없는 존재의 생성은 방향성을 결여한 동일자만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니체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차별자의 영원한 회귀이자 과학, 의식 밖에서 새로운 원리를 요구하는 <차이의 부정>의 부정이다. 니체 철학의 영원회귀는 어떠한 균형의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주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부정한다. 지나간 시간이 무한하다면 새로운 생성은 스스로를 시작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최초의 생성은 시간의 시작이며 생성의 최종 상태는 소멸이다. 시간의 시작과 종결을 통해 사람들이 생성을 사유, 관찰할 수 있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왜 생성을 시작하겠으며, 시작하더라도 왜 생성을 이어나가겠는가?) 이러한 배경에서 생성되고 있는 것의 존재만이 있다.이들의 시간은 현재, 지나간 것, 도래할 것의 종합적 관계이며 공존이다. 영원회귀는 시간의 종합, 생성을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이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차별자들의 어떤 원리에 의한 되돌아옴이고, 이 원리로 니체는 권력의지를 제시한다. 권력의지는 힘과 힘의 관계를 결정하면서 힘들의 종합과 신체를 위한다. 권력의지는 힘, 그것의양과 질, 방향성과 분리될 수 없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 의지는원하는 것이다>

<권력의지는 x+dx와 dy/dx 모두를나타낸다>


권력의지에 의해서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보다 우세하고 지배하거나 명령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의지는 해석하는 자뿐만 아니라 평가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해석하기는 사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결정하는 것이고, 평가하기는 사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권력의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서의 Sens, 의미와 Valeur, 가치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추가로 찾아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의 의미화는 사물 속에 표현된 힘의 성질 속에 있다. 그리고 어떤 가치의 가치화는 상응하는 사물속에 표현된 권력의지의 성질 속에 있다. 여기서 계보학만이 가치들의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가치들의 미분적 요소, 즉 우아함과 비루함은 가치들의 기원으로 다가가 그들을 해체함으로써만 밝혀낼 수 있다. 가치론이 그것의 기원에서부터 멀어질수록 <평가 = 창조>라는 니체의 등식에서 멀어지고 현행하는 가치들의 비판을 할 수 없게 된다. 가치들의 기원으로 다가가면 우리는 기원에서부터 적극적 힘과 반응적 힘이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반응적 힘의 기반에 있는 인간의식은 자신이 관찰하는 모든 것을 뒤집는다. 차이를 긍정하는 것과 달리 반응적 힘은 차이를 부정하며 신체와차이의 수용에서 등을 돌린다. 반응적 힘들은 적극적 힘들을 분리시키고 분해한다. 그래서 니체는 적극적 힘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항상 강자들을 약자로부터 방어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승리 여부는힘의 해석에 관련이 없으며, 승리하는 힘들이 열등한지 우월한지, 반응적인지 적극적인지 판단해야 하고, 그 영역엔 해석들만이 존재한다. 그리고그 해석은 현존하는 사회질서 밖에서 수행되어야 하는데, 이미 사회질서는 반응적 힘들로 구성되어 있기때문에 해석과 비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주의자, 현대의 실증주의자들은 <약자들이 우월한 힘을 형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승리하는가? 실현된 사실에 승복하자>라고말한다. 그들은 현실세계를 인도 할 때만 가치들을 찾으며 이들을 비판에 활용하지 않는다. 도덕, 국가, 종교 등등을 위해서 가치들에 대해 토론하며, 인권, 천부, 충, 효, 의무 등등이 그 결과물로써 생겨났지만 이들에의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힘들의 기원이나 성질에 대해 탐구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으로 해석에의 무능, 힘의 성질들에 대한 무지, 사실숙명주의가 있다. 이들이 다루는 사실들은 반응적일 뿐이다. 그리고 니체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닌 사람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사람을 약자, 노예라고 부른다. 강하지 못한 자도 그가 할 수 있는 영역의 끝까지 간다면, 적극적이 된다면 주인이 될 수 있다. 니체는 이를 그의 철학의 정수, <영원회귀>라고 칭한다. 영원회귀에 앞서 왜 인간들이 반응적 생성과 반응적 힘만을 느끼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인간성의 토대가 반응적 생성이기 때문이다. 원한, 가책, 허무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원리이다. 이 조건은 영원회귀를 위태롭게 만든다.불만, 불쾌, 혐오가 영원히 회귀하게 되어 존재를 위태롭게 만들고, 영원회귀 자체를 모순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반응적 생성 대신 다른 생성, 초인이 필요하다. (니체는 초인과 영원회귀를 모두 힘의 적극적 생성과 일치시킨다)


 힘들의 적극적 생성, 반응적 힘들의 적극적 생성은 인간이 인지하지 못했던 생성이다. 반응적 힘들은 상이한 관점에서 다루어 질 수 있다. 이들은 적극적 힘을 분리시키고 반응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질병은 나를 반응적으로 만들고 가능성을 축소시키지만 반대로 새로운 능력을 드러내고, 내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의지를 부여한다. 여기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종교적 인간을 초인의 이전 단계로 묘사한 이유가 드러난다. 종교라는 질병의 끝까지 나아간자. 종교적 인간의 적극적 이행은 새로운 적극적 생성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반응적 힘들이 이런 수순으로 귀결되진 않으며, 퇴락하는 힘들의 구분을 위해 계보학자가 필요하다.


 인간들은 생성들을 사유할 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선택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성들, 특히 반응적 생성들을 선택할 수 없으며 낙타와 같이 생성을 받아들이기만 하기 때문이다. 생성들의 선택은 오로지 영원회귀로만 가능하다. 단 한번의 긍정은 니체 철학에 있어 퇴락, 역겨움이지만 영원회귀는 실천적 규칙이다.<네가 의욕하는 것, 그것을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원하라> <만약 네가 하고 싶은 것에 있어서 네가 무한히 그것을 하길 원하는지를 확신하는지 자문하면서 시작한다면, 그것은 네게 있어서 가장 확고한 무게 중심이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사유는 의욕을 창조로 만든다. 그러나 아직 이것만으로 반응적 힘을 모두 제거할 수 없다. 인간의 사유에서 반응적 힘이 영원회귀의 탈을 쓰고 다른 반응적 생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원회귀의 사유는 허무주의의 형태를 띤다. 특히 영원회귀만이 가장 극단적인 허무주의이다. 왜 영원회귀가 가장 극단적 허무주의인가? 니체가 비판하는 무의 의지가 극단적 허무주의가 아닌가? 무의 의지는 힘들의 반응적 생성인데, 이것은 반응적 힘들의 보존, 승리,전염을 만든다. 허무주의적 형태를 나타내지만 어느 지점에서부터 무의 의지는 허무주의에서 분리된다.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허무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회귀는 반응적 힘들의 보존도 부정한다. 이는 약자들의 사멸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그는 파멸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반응적 힘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적극적 힘들을 긍정으로, 부정 자체의 긍정을 이루어낸다. <적극적 생성만이 존재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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