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존재 이유는?
3장 - 비판
과학의 기반인 사실은 사실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의 해석으로 존재한다. 해석은 선택이고, 반응적 속성과 적극적 속성으로 나뉜다. 여기서 니체는 과학의 발전이 반응적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이 장에서 과학을 순수 과학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반적인 학문으로 확장시킵니다)
공리주의를 예로 보자. 사람들은 행동을 실리에 의해 판단한다. 여기서 판단자는 누구인가? 행동자는 아니다. 그는 행동을 주시하지 않는다. 결국 행동을 판단하는 자는 제 3자인데, 그는 행동을 판단할 때 그가 행동에 대한 모든 권리를 소유하는 듯 믿는다. 힘들의 다중적, 실제적 관계들을 하나의 관계로 대체하는 것이다. 언어학을 다른 예시로 보자. 사람들은 청자의 관점에서 언어를 판단한다. 그러나 단어는 화자가 말할 때, 화자가 원함에 따라서 뜻이 결정된다. 니체의 적극적 언어학은 말하는 자, 명명하는 자의 편이다. 한 단어의 의미 변화는 어떤 힘과 의지가 다른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독점하고, 투쟁함을 일컫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의 핵심 질문을 알 수 있다. 그 동안의 형이상학의 의문은 <무엇?>이었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정의로움은 무엇인가?>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질문 자체에 대한 의문은 제기되지 않았다. 그리고 니체는 그 근본적인 질문을 <누가?>라고 정의한다. 어떤 사물을 고려할 때, <누가?>는 그 사물을 독점하고, 소유하는 의지가 무엇인지를 의지한다. <누가?>라는 질문에서만 사물의 의미와 가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누가?>라는 질문에서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가 파생한다. 원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 감정, 사유의 기원이고 비판이다. 물론 어떤 의지가 원하는 것은 특정 대상, 목표가 아니라 그것들의 힘이다. <이것을 사유하는 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물을 때 <누가?>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권력의지의 성질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은 의지철학을 오해했었다. 먼저 사람들은 의지가 권력을 원하거나 지배를 욕구하며 모든 권력은 표상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성의 표상은 노예적이다. 권력의지를 우월성의 표상으로 오해함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봄이 아니라 열등감의 표현일 뿐이다. 권력의지를 우월성의 표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재 인정된 가치들을 재인식의 기준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권력의지를 필연적으로 사회 내에서 주어진 가치들과 결부시키는 행동이다.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은 의지가 스스로 부여해야 할 가치들을 사회 내에서 주어진 기존 가치들로 대체한다. 여기서 순응주의를 느낄 수 있다.
니체는 지금까지의 의지철학에 반대하며, 과거의 형이상학을 새로운 의지철학이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구상한 의지철학의 등식은 <의욕=창조>, <의지=기쁨>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창조와 기쁨을 본질적인 것으로 제시하는가?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은 의지가 권력을 원하듯, 또는 권력이 의지를 원하듯 이해했다. 그 때문에 기존 가치들의 부여에 의해 권력을 판단하였고, 권력의지를 고통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니체는 의욕이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한다. 기존의 가치들을 자신에게 부여하길 꿈꾸는 어떤 의지의 이미지에 반대해서 니체는 의욕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임을 알린다. 이는 권력의지가 어떤 인간적 형태로 함축하고 있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원하는 것이다. 또한 권력은 의지 내에서 미분적 요소이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그리고 권력은 표상되지도 않고 해석되거나 평가되지도 않는다. 권력은 해석자, 평가자이다. 권력은 힘과 힘의 관계를 결정하고 관계 속에서 힘들에게 성질을 부여한다.
<즉 모든 현상은 그것의 의미, 가치를 구성하는 어떤 유형을 가리키며, 또 그것의 의미화, 그것의 가치의 가치가 파생하는 요소로서의 권력의지를 가리킨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고 주는 자이다. 의지 자체는 권력에 의해서 의미와 가치를 제공하는 자이다.>
여기서 인간 보편의 감정, 우아함과 고귀함이 비루함, 저속함보다 어떻게 더 가치 있는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긍정은 왜 부정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일까? 이는 되돌아오는 것, 영원회귀를 원하는 것이 더, 절대적으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반응적 힘을 죽이고 부정을 전환한다. 영원회귀에서 파괴는 적극적이 되고 공격성은 긍정이 된다. 가치들의 창조자는 파괴자, 기존 가치들의 비판자가 된다.
니체는 <도덕 계보학>이라는 책을 통해 반응적 힘들의 승리의 모습, 허무주의적 형태인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을 분석한다. 여기서 그는 무엇이 계보학을 변질시키고 서열을 전복시키는지 분석한다. 그 전에 비판이 무엇이고 철학이 어떤 점에서 비판적인지 먼저 분석한다. 반응적 힘들은 적극적 힘들을 가능한 한 분리시키며 승리한다. 이는 신비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니체는 원한을 <가상적 복수>, 가책을 <정신적이고 가상적인 사건들>, 금욕적 이상을 <도덕과 인식의 허구를 이해하는 이상의 신비화>라고 가리킨다. 여기서 니체의 비판은 그 전까지의 비판들, 특히 칸트 이후 헤겔부터 포이어바흐의 <비판적 비판>과는 다르다. 그들은 누가 비판을 해야 하고, 누가 그것을 할 능력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이성인지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반응적 존재라면, 그는 어떤 권리에서 비판을 할 것인가?>
<종교를 회복시킬 때, 우리는 종교적 인간이길 그만둘 것인가?>
<신학을 인류학으로 만들 때,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인가?>
칸트의 비판은 타협적이다. 물론 칸트는 비판을 전면적으로, 적극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비판을 인식 자체나 진리 자체에 근거하는 대신, 도덕에 대한 열망에서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 다른 신성> 칸트가 사실이라 부르는 것은 도덕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은 빈약하고 편협할 뿐이다. 니체는 사실이나 도덕적 현상은 없고 현상들의 도덕적 해석만 존재했다고 조소한다. 그에게 칸트의 인식 자체는 환상, 오류이다. 칸트의 선험 철학은 선험적 원리들을 도입하지만, 이는 여전히 선험 철학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니체에게서 원리들은 결코 초험적이지 않고 계보학적이다. 그것의 끝엔 권력의지가 있다. 계보학적, 입법적 원리로서 권력의지만이 온전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참된 철학자들은 명령하고 입법하는 자 들이다>
철학자에게서 인식은 창조이고, 그의 작업은 입법화이며, 그의 진리의지는 권력의지이다. 여기까진 니체가 칸트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니체가 칸트를 비판하는 지점은 이성이다. 우리가 더 이상 복종하길 원하지 않을 때 칸트의 이성과 선험적 원리들이 나타난다. 신, 국가, 부모 등에게 복종하길 그만 둘 때, 칸트는 <명령하는 것은 바로 너다>라고 말한다. 실천 이성이라는 미명아래서 칸트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성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경우들을 위해 아주 의도적으로 하나의 이유를 만들어냈다. 즉 마음의 필요, 도덕, 의무가 말할 때이다. 이에 반대로 니체는 다섯 가지 비판의 유형을 제시한다. 이 유형들은 비판의 끝으로 나아가는 허무주의적 비판을 이룬다.
1. 단순한 조건인 선험적 원리가 아니라 해석들, 평가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기원적이고 조형적 원리들
2. 이성에 반대해서 사유하는 사유
3. 창조자, 계보학자
4. 추월당하고 극복당하길 원하는 인간
5. 초인을 위한 비판
지금까지의 철학은 진리를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이 또한 비판한다. <우리가 진리를 원할 때, 그 반대로 비-진리나 불확실성, 무지를 원할 수는 없는가?> 진리의 개념은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하고 참된 인간을 전제한다. 참된 인간을 원하는 인간의 인식은 자신의 삶과 대립된다. 이는 도덕적 기원의 대립이다. <삶에 반대하는 삶> 그리고 금욕적 이상의 인간, 퇴화하고 축소된 삶, 자기 유형의 권력과 승리, 허무주의가 나타난다. 이들은 <우월하다>고 불리는 가치만을 긍정한다. 왜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났는가? 니체는 삶에 종속된 수단일 뿐인 인식이 최상의 심급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인식은 이성에 복종하는 사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원래 삶은 사유와 함께 나아가고, 사유는 삶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준다.
<어려움들이 비범함과 관련되는 삶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사유자들의 삶이다>
<위대한 항해자들의 항해만큼의 창의력, 사색, 과감성, 절망, 이상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삶의 가장 외지고 험난한 영역들에서의 탐험 여행이다>
이 때 사유는 단지 셈, 이성이길 중단하고, 삶은 반작용이길 중단한다.
니체의 예술론은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니체의 예술에 대한 입장도 이처럼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권력의지의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 지금까지의 예술은 관람객의 관점에서 판단되었다. 그러나 니체는 예술작품에 포함된 예술가의 긍정, 활동성, 예술가 자신의 권력의지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예술은 거짓의 가장 고귀한 힘이고 어떤 의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의지는 금욕적 이상과 경쟁하는 예술가의 의지이다. 여기서 진리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진리는 힘의 실현, 가장 고귀한 힘으로의 상승이다. 예술가는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니체는 이제 철학의 의미를 도출한다. 진리=본질=힘의 실현은 우리가 사유하는 것의 가치와 의미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는 복수적 유형학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오류, 진리는 어떤 영역에 속하며 그것들의 유형은 무엇이고, 누가 그것들을 정식화하고, 그것들을 구상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식으로 사유를 적극적이며 공격적,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비판으로서의 철학, 탈신비화의 기획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유는 사유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존한다. 우리 사유가 반응적 힘들에 점령되어 있고 계보학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동안 우린 아직 사유하지 못한다. 이렇게 대다수 사람들에 자리하는, 사유를 강요하는 반응적 힘들이 <문화>이다. 문화란 본질적으로 훈련이고 선택이며 독점하는 힘들의 폭력이다. 우리는 사유하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행사되는 힘들에 의해서 사유함을 알아야 한다. 문화의 종적 활동은 문화 자체의 예술가, 철학자, 순교자를 만든다는 목적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진리가 어떤 요소, 어떤 시간, 어떤 장소의 진리, 유형학적임을 알아야 한다. 한 사유자의 삶은 장소, 시간, 요소 세 가지로 충분하다. 가장 심오하고 고귀한 진리, 사유자는 극단적 장소(사막, 산), 극단적 시간(태초, 유년기, 정오), 극단적 요소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