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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질 들뢰즈 - 니체와 철학, 4주차

기독교적 원한과 노예의 정식

4장 - 원한에서 가책까지


 반응적 힘들은 항상 작용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적극적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든다. 이것들은 어떤 순간에 정해진 방향으로 창조를 재촉한다. <참된 반작용은 작용의 반작용이다> 그 점에서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 힘뿐만 아니라 참된 반작용도 포함한다. 그래서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 힘들과 반응적 힘들 사이의 어떤 관계를 표현하는데, 정상적 경우 반응적 힘들은 스스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원한은 적극적 유형과는 반대로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 힘들의 작용을 피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반응적 힘들이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오로지 작용을 제한하기만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반응적 힘들은 어떻게 적극적 힘들의 작용을 피하는가? 이는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과 그에 상응하는 니체의 저작에서 알 수 있다.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은 흥분의 수용과 그 흔적의 보존을 개별적 체계로 구분한다. 이 두 체계는 각각 의식과 무의식에 상응한다. 의식은 기억의 흔적이 멈추는 곳에서 태어나고 기억에 작용한다. 따라서 의식 체계는 기억과 그 기억의 문명이 작용하는 진화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가설은 프로이트의 저작보다 먼저 니체의 저작 속에서 발견된다. 니체는 반응적 장치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한다. 이 두 장치는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에서의 두 체계와 동일하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데, 흥분의 수용과 기억이 다른 체계라면 이 과정에서 생기는 망각은 무엇인가? 니체는 망각을 적극적 능력으로 규정한다. 심리학은 망각을 부정적 성향으로 다루었지만, 니체는 오히려 망각을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흥분의 수용과 기억을 반작용으로 보았을 때 반작용은 망각에 의해 영향을 받는 어떤 것이 된다. 두 반작용은 망각에 의해 완충장치를 얻게 된다. 여기서 망각 능력의 쇠약을 가정하자. 이 경우 흥분의 수용이 의식에 밀어닥칠 때, 반작용들은 영향 받길 중단한다. 적극적 힘들은 스스로를 실행할 조건을 찾지 못하여 분리된다. 질병은 모든 것이 반응적 힘들로만 이루어질 때 발생한다. (그러나 반응적 힘들로만 이루어진 질병을 부정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반응적 힘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때 인간은 새로운 능력을 자각 할 수 있다. 질병에 걸려 신체가 어떤 반응을 받을 경우 인간은 이에 반응하는 치유 능력이나 신체, 의식의 변화를 인지하게 되고, 새로운 존재 상태를 알게 된다.)


 원한의 인간을 기억의 흔적이 의식으로 침투하는 현상이라고 특정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이 어떻게 자기에 맞게 기억을 재단할 수 있으며, 흔적들이 더 이상 근거하지 않는 거의 적극적이면서 영향 받는 기억을 구성할 수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놀랄만한 기억 능력과 불구의 망각 능력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어떤 것을 잊는데 있어서 무능력한 인간의 유형, 이는 유형적으로 생물학적인 동시에 정신적이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 현실이다. 왜 원한이 복수심인가? 고통을 느낀 이가 충분히 강하지 않기에 반응을 단념하고 복수의 욕망을 느낄 것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이는 수용된 흥분의 양만을 검토하고 있다. 그런데 니체의 <누가?>라는 질문을 고려했을 때 중요한 것은 주체 자신 속에서의 힘들의 관계이다. 니체에 있어서 원한의 인간은 반작용만 이루어지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흥분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 흔적 이외에 집중하지 못하는 무능력. 원한의 인간은 그가 그 결과를 감수하는 만큼 모든 세계를 모욕으로 느낀다.

<모두 상처를 준다. 인간들과 사물들은 조심성 없이 너무 가까이 접근한다. 그들의 흔적은 제거될 수 없다>


 흔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은 감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무능력자이자 스스로 증오심에 가득 차 있는 인간이다. 애호하는 추억 속에서 조차 복수심이 감춰져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며 겸손을 떨지만, 이 안엔 경멸만 가득 차 있다. 사랑할 수도, 사랑하길 원하지도 않으나 사랑받길 원한다. 그들은 도덕조차 실리적 관점에서 사용하며 무사심함, 공리주의적 태도를 도덕으로 숨긴다. <잘못의 전가, 책임의 분배, 영원한 비난>


 노예의 정식은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이다. 반대로 주인의 정식은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이다. 두 정식의 차이는 타인의 악의를 기초로 삼아야 자신의 선량함이 나오는가의 여부이다. 이 두 정식을 보기 전, 선량함이라는 개념의 복수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선량하다>라고 말하는 자는 소위 선량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말할 뿐 이다. 그는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이 직접 가치들을 창조한다. 그의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 속에 있다. 반대로 노예의 정식, 악의가 있음은 결과를 의미하고 노예를 지시한다. 부정적인 것, 허무주의의 전제가 시작이 된다. 여기서 노예가 창조하는 가치는 타인을 상정함으로써 자신을 상정하는 우스꽝스러운 가치이다. 이는 증오를 기반으로 하는 원한의 가치이다.


 원한은 개인의 단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삶에 대립하는 허구, 우리는 이를 앞에서 보지 않았는가? <삶에 대립하는 신의 허구> 적극적 힘이 분리됨과 동시에 그들은 죄가 있는 것으로 다루어지며, 원죄 개념을 만들어낸다. 종교, 즉 사제는 원한에 형태를 부여하고 복수의 계획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는 반응적 힘의 승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세계에 반대해서 성공할 수 있는 권력을 얻는다. 기독교의 사제, 유대교의 랍비, 이슬람교의 칼리프와 같이 신의 허구를 주장하는 종교의 지도자들은 모두 허무주의적인 인간의 유형을 만들어내는 인간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유형은 원죄 개념을 받아들인 자, 고통을 내재화하는데 성공한 인간들이다.


 종교가 고통을 내재화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내재화된 고통에 의해 새로운 의미, 내적인 의미, 속뜻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고통을 원죄, 잘못의 결과로 만든다. 그런데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존은 고통이 의미를 갖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고통은 반작용이다. 우리는 고통을 현존의 반대로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고통 받는 자의 관점에서 고통을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외재적으로 판단한다. 고통은 니체에게 삶의 흥분제이다. 고통스러워하는걸 보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삶의 적극적 표현이다. 이는 인간의 역사에 드러났던 잔인성으로 알 수 있다. 생존을 위함이라는 가면 아래 고통의 기제가 존재했었다. 다시 고통의 내적 의미로 돌아가면 사람들은 고통에 반대하며 열정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을 잊는다. 이는 가책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에게 다시 사제가 개입한다.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은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여기서 사제는 <그들은 악의가 있다>고 말한다. 원한의 힘은 전적으로 다른 이를 향한다. 그런데 원한의 반응적 힘은 자신의 적극적 힘들을 반응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서, 지난 시간 속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고 그것을 처벌로 내재화하게 된다. 결국 원한은 <그것이 네 잘못이다>라고 말했고, 가책은 <그것은 내 잘못이다>라고 말한다. 인간들은 노예가 되며 사제는 고통 받는 자들의 주인이 된다.


 아직 원한이 가책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향하게 되는지 방향전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니체에 의하면 그 문제는 문화에 달려있다. 문화는 훈련과 선택을 의미한다. 니체는 문화의 운동을 <풍속의 도덕성>이라고 부른다. 계보학의 관점에서 문화는 두 갈래로 나뉜다. 먼저 민족, 인종, 계급 속에서 사람들이 복종하는 반응적 힘이 있으며, 그리고 민족, 인종, 계급을 능가하는 법, 도덕의 적극적 힘이 있다. 이러한 풍속의 도덕성은 보편사를 선행하며 모든 역사적 법칙은 자의적이지만, 법칙들에 복종하는 것은 법칙이다. 인간을 문화 안에서 교육한다는 것은 그가 반응적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다. 문화는 무의식의 반응적 힘과 신체에도 작용하지만 주로 의식의 강화에 주력한다. 문화는 의식에게 망각의 능력과 대비되는 기억의 능력을 부여한다. 여기서의 기억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미래에 얻게 될 기억, 미래 자체에 대한 기억이다. 여기에 문화의 선택적 대상이 드러난다. 미래 자체의 기억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 미래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만이 적극적이다. 그는 반응적 힘을 행사하지만, 그 자신 속에서 미래, 모든 것은 적극적이다. 미래의 기억을 선택하고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문화의 최종적 산물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문화는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가? 문화는 고통을 약속의 등가물로 만들었고, 정의를 결부시켰으며 처벌을 이행의 수단으로 삼았다. <야기된 손실 = 감내한 고통> 정의는 인간을 부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니체는 신용관계에서 사회 조직의 원형을 본다. 그러나 문화의 최종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선 안 된다. 문화의 수단은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나 문화의 최종 산물은 책임 있는 인간, 도덕적 인간이 아닌 자율적이고 초-도덕적 인간, <반응적 힘들을 행사하는 자, 그리고 자신 속에서 모든 적극적 힘들이 영향을 받는 자>이다. 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책임이 없다. 문화의 모든 활동이 선택적일 때, 종적 활동 자체가 제거되는 개인을 낳는다. 니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종적 계보는

1. 훈련과 선택의 기획인, 역사적이고 종적인 활동으로서의 문화

2. 그 활동에 사용된 수단, 처벌의 등식, 부채 관계, 책임 있는 인간

3. 그 활동의 산물, 적극적이고 자유로우며 강력한 인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다.


 여기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종적으로 반응적 존재라면, 그가 섬기는 종적 활동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 종적 활동의 역사 속에서 종적 활동 자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는 나중에 살펴보는 대신, 반응적 힘들이 활동에 이식되는 순간에 주목해야 한다. 반응적 힘들이 종적 활동에 이식될 때 <신성함, 사회, 국가>에 대한 부채를 동반한다. 이 책임의 관계는 적극적 힘들을 나누어 반응적 힘으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한 채권자-채무자 관계에서 이자만을 지불하게 된다. 한편 부채-책임성의 관계는 반응적 힘들이 결집 할 때 죄의식-책임성의 관계로 바뀌게 된다. <신성함, 사회, 국가>에 대한 부채의 관계가 원한과 가책의 형태를 취하여 죄의식-책임성의 관계로 변한다. 이 때 부채는 그것이 인간의 해방에 참여했던 적극성을 상실한다. <신 자체는 인간의 부채를 갚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주고 신은 그 부채를 스스로 갚는 대신 그만이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제 반응적 힘들만이 남고, 반응적 힘들이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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