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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질 들뢰즈 - 니체와 철학, 5주차(마지막)

초인과 창조는 허무주의를 넘어

5장 - 초인 : 변증법에 반대해서


1. 허무주의의 첫 번째 유형 : 우월한 가치에 의한 삶의 부정 - 부정적 허무주의

 허무주의, Nihilism에서 허무, Nihil이란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가치를 의미한다. 삶은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비하하는 한에서 무가치해진다. 비하는 항상 허구를 가정하며 허구에 의해 사람들은 삶에 어떤 것을 대립시킨다. 그렇게 삶이 비현실적이 되고, 총체적으로 무가치해진다.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은 그것들의 효과, 즉 삶을 비하하는 부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삶을 부정하고 무화시키려는 의지와 관계가 있는 것은 우월한 가치들이다. (무의 의지)


2. 허무주의의 두 번째 유형 : 우월한 가치 자체의 부정 - 반응적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두 번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더 이상 의지가 아니라 반작용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우월한 가치에 반대해서 반응하고, 그것의 현존을 부정하고, 그것들에게서 모든 타당성을 부인한다. 그것은 우월한 가치들 자체의 가치 박탈이다. 그 무엇도 진리가 아니며 선하지도 않다. 신은 죽었다.


 무의 의지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하게 만든다. 이들의 근본적 결탁은 반응적 힘들이 끝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오히려 수동적으로, 꺼지듯 소멸하기> 반응적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를 연장한다. 이러한 <수동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극단적 완성이다. 이는 연민과도 동일하다. 신은 죽었다. 그는 왜 죽었는가? 니체는 그가 연민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0)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이다. 연민은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누가 연민을 느끼는가? 소위 반응적 삶만을 감내하는 자, 그 삶 위에 사원을 세우는 자이다. 니체의 상징주의에서 연민은 항상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의 복합체, 전자와 후자의 유사성, 전자의 후자에 대한 관용>을 가리킨다.

<연민, 그것은 허무주의의 실천이다. 연민은 무를 납득시킨다! 사람들은 무를 말하지 않고 내세, 신, 참된 삶, 혹은 열반, 구원, 지복을 적당한 자리에 놓는다.>


 신은 연민으로 질식했다. 반응적 인간은 그 자신을 신의 자리에 놓는다. 그는 삶을 가장 우월하다고 인식하지만, 그 삶은 반응적 가치만을 전파시키길 열망하는 반응적 삶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신을 우리에게서 제거하시오. 오히려 자기 머리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오히려 미쳐 버리는 것, 오히려 자기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 좋습니다.> 신을 대신한 반응적 인간은 일정한 가치만을 파급시킨다. - (적응, 진화, 진보, 만인의 행복, 공동체의 선, 그리고 신적인 인간, 도덕적 인간, 사회적 인간, 진실한 인간) 이들은 그들의 가치 이외 다른 어떤 가치도 알아보려 하지 않는 무기력한 인간이다. 이들의 등장은 현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는 인간사의 특정 지점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보편사로서의 인간의 동력이다. 그래서 유대교, 기독교, 개혁, 자유 사상,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이데올로기, 이 모두는 허무주의이다.


1. 신 - 부정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신의 관념은 무의 의지, 삶의 비하를 표현한다. 사람들이 내세에, 무 속에 삶의 중심을 놓을 때 그들은 삶에서 중심을 빼앗는다. 그들은 삶이 병들고 반응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죄 지은 자들을 위해 죽었다. 신은 인간을 위해서 그를 죽인다. 신은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인간이 그 죽음에 죄의식과 책임을 느끼고 보상하는 한 그 사람에 보답하게 된다. 모든 삶은 반응적이 된다.


2. 신 - 반응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반응적 삶이 본질적인 것이 될 때, 무의 의지와 반응적 삶이 종합한다. 인간, 유럽인이 신이 된다. 무의 의지는 극단적 반응적 삶을 일으키고, 이는 신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반응적 인간은 신을 질식시켜 죽이고, 신은 그가 사랑한 배은망덕한 인간에게 질식당한다.


3. 신 - 수동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 불교적 의식의 계기

 신이 사랑으로 예수를 죽였다고 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면, 예수의 죽음을 예수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즐거운 소식, 원죄의 관념의 제거, 원한과 복수심의 부재, 모든 전쟁의 거부, 아래 세상에서의 신의 왕국의 계시, 죽음의 수용이다. 예수는 일종의 부처였다. 그는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쳤고, 그 자신도 그렇게 죽었던 수동적 허무주의자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직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불교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니체 철학과 헤겔 철학의 차이가 드러난다. 헤겔은 예수의 죽음을 극복된 대립, 유한과 무한의 화해, 신과 개인의, 영원한 것과 특수한 것의 통일이라고 의미한다. 그런데 보편과 개별, 영원과 특수, 유한과 무한은 모두 징후일 뿐이다. 보편과 개별, 영원과 특수, 유한과 무한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주체인가? 이것들은 어떤 의지의 대상인가? 헤겔의 변증법은 해석하지 못한다. 변증은 대립으로 살아간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징후 아래의 미분적 요소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모순, 변증법은 차이에 대한 오해 그 자체이고, 의미를 알지 못한다. <누가?>라는 의문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헤겔과 포이어바흐는 <누가 인간이며 누가 신인가? 무엇이 특수하며 무엇이 보편적인가?>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에 대답한다. 인간은 항상 반응적 존재, 표상하는 것, 약하고 비하된 삶의 주체이다. 신은 항상 삶을 비하하는 수단으로서의 우월한 존재, 무의 의지의 대상, 허무주의의 술어이다. 이에 대한 해답 없이 인간과 신의 화해를 알리는 변증법은 결국 허무주의적, 기독교적이다. 변증법을 예감하기 위해선 <그 의지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으로 충분하다. 니체는 <누가 인간인가?>를 넘어서 <누가 인간을 극복하는가?>라고 묻는다. 극복하는 것, 가치 전환은 현행의 가치들과 대립하며, 변증법적인 인간, 절대자로서의 자아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초인은 새로운 감각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것은 새로운 사유 방식, 가치가 파생하는 요소 속에서의 변화와 전복, 가치전환이다. 차라투스트라의 4부는 우월한 가치의 대변자인 인간의 이론을 다룬다. 예언자, 두 명의 왕, 거머리를 가진 인간, 마술사, 마지막 교황,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 자원한 거지, 그리고 그림자이다. 이들은 인간의 반응적 본성과 종적 활동을 나타낸다. 이들은 반응적 힘들의 승리의 대표자이다. 종적 활동의 산물의 대표자이다. 니체가 우월한 인간을 왜 두 측면으로 다루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인간은 어느 정도로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때 해석될 수 있다. 니체가 허무주의를 인간의 선험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의문은 인간의 본질 자체에 도전하는 의문이다. 니체는 인간적이었던 인간사에서 적극적 시기의 적극적 인간들을 불러내고 자유롭고 주권자인 개인을 말한다. 그런데 힘들의 성질에 앞서 힘들의 생성이 우선한다. 그래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더 심오하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인간과 세계는 모든 힘들의 반응적 생성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생성은 생성하면서 반대되는 성질의 현전도 요구한다. (유태에 전속된 로마, 종교 개혁에 전복된 르네상스 등) 그러므로 정말로 인간의 적극적 힘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우월한 인간들에게 실패했다고 말한다. 이는 그들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응적 힘의 승리로서의 반응적 인간과 본질적으로 실패하는 적극적 인간이 화해를 이룬다. 그래서 초인이 우월한 인간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인은 우월한 인간과 목적뿐만 아니라 생성되는 조건도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힘들의 반응적 생성이다. 이는 힘의 적극적 생성을 본질로 삼는 초인과 근본부터 다르다. 인간들은 가치들을 전복시키는 대신에 가치들을 바꾸고 그것들을 교대시킨다. 그것들이 파생되는 허무주의적 관심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초인의 요소는 긍정이다. 니체는 초인의 긍정을 네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1. 웃기, 놀기, 춤추기. 웃는 것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고, 삶 속의 고통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노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고, 우연의 필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춤추는 것은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2. 우월한 인간들은 당나귀를 그들보다 <우월한 자>로 인정하고 신처럼 연모한다. 나귀의 울음소리 이-아, I-A는 독일어의 Ja(네)이다. 니체는 나귀를 긍정적이고 긍정하는 짐승, 디오니소스적 짐승으로 여긴다.


3. 그림자는 인간의 활동이지만, 상위의 심급으로 빛을 필요로 한다. 빛에 의해 그림자는 변형된다.


4. 개는 사실 대지의 중심에서 말한다. 그것 주변에서 색조를 띤 구름처럼, 개의 주변에는 웃음이 따른다.


 니체 철학은 가치들의 변화가 아니라, 가치가 파생하는 심급의 변화라는 점에서 가치 전복을 말한다. 사람들이 부정의 요소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이 신을 아무리 죽여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요소를 변화시킬 때, 그들은 가치를 전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치가 파생하는 요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부정을 어떻게 긍정으로 대체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니체 철학을 기반으로 하면, 니체가 이에 대한 답으로 허무주의를 내세움을 느낄 것이다. 허무주의는 극복되지만, 자기 자신에 의해 극복된다. 첫 번째 이유는, 가치들의 요소를 변화시킬 때 사람들은 기존 요소에 의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기존 가치들에 대한 비판은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비판, 허무주의적 비판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허무주의는 권력의지의 성질로서의 부정이다. 권력의지는 인간 속에 있지만, 우리는 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 권력의지는 허무주의, 무의 의지를 통해서 인식될 수 있다. (그림자는 빛의 변형에 의해 인식된다) 그래서 부정은 권력의지의 인식 이유이다. 반대로 긍정은 권력의지의 존재 이유이다. 긍정은 의지의 부정을 추방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한다. 허무주의는 긍정 속에서 전환되지 않는 한 완성되지 않는다. 부정이 긍정으로 변하는 디오니소스적 전환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면 우선 서로 증오해야 하지 않겠는가?>

<네가 나를 긍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면 너는 나를 부정으로 인식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수동적 허무주의가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로, 자기 파괴에 이르는 허무주의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응적 인간이 자기 파괴를 의욕하기조차 지쳐 자신을 보존하려하는 대신 자기 파괴를 의욕한다면, 그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다. 그는 초인의 아버지이다. 적극적 파괴는 <생성의 영원한 기쁨>이자 디오니소스의 끝이다. 이제 초인을 다룰 수 있다. 긍정은 인간 밖에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초인은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우월한 자>이자, <모든 것의 영원한 긍정>이다.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하고 무제한적인 부정이 직접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네>를 말하는 어린 아이 앞에 <아니오>를 말하는 사자를 배치시켰다. <네>라고 말하기 위해선, <아니오>라고 먼저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때에서야 비로소 모든 부정은 긍정하는 힘이 된다. 부정은 긍정의 존재 방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르는 긍정은 거짓된 긍정인가? <네>라고 밖에 말할 줄 모르는 당나귀는 차라투스트라의 낙타와 같다. 당나귀의 긍정은 짐을 지고 책임을 떠맡는 것, 현실에 복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현실을 긍정만으로 느낀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긍정의 입장에 반대한다. 니체에게 존재, 진리, 현실은 허무주의이다. 이는 이상을 위해 삶을 대립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니체의 긍정은 존재의 짐을 지고 책임을 떠맡지 않고, 오히려 존재를 해방시키고 책임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즉 니체의 긍정은 진리가 아니라 평가이고, 수락이 아니라 창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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