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무풍지대와 구조주의 철학
처음인지라 책으로 들어가는 대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어떠한 사람이었고 대략 어떤 주장을 했는지, 또 그가 영향을 준 사상과 받은 사상 등 기본적인 지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의 대표작으로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니체가 통렬히 비판하였던 소크라테스적 가치와도 연관됩니다. 기존 서양의 사유는 이성으로 대표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이라고 주장하며, 이성을 통해서 인간의 우월성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는 이성을 감성과 동등하다고 전제하지 않습니다.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며, 감성은 열등하다고 인식됩니다. 기존의 서양철학은 이성을 통해서 학문과 사회가 구조적으로 정립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의 구조란 건물의 구조와 같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유동적으로 항시 변화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성을 통한 분류와 분석, 사고만이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얼핏 생각하면 타당해보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로 언어와 꿈 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며 감성도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언어를 보자면, 언어의 구조는 뇌에 무의식으로 존재합니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말을 할 때 문법을 생각하며 말하지 않는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구조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 그 반대의 영역에 존재합니다. 반면 우리가 외국어를 할 때는 문법을 생각하면서 말하기 때문에, 언어의 구조는 개개인에 따라 얼마나 야성(감성)에서 구조화되는지를 달리합니다.
또 다른 예시로는 꿈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개인에 따라 분류할수도 없고 분석할수도 없는 꿈도 구조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꿈의 내용은 다르지만, 꿈의 기저를 이루는 욕망들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것이 단지 개인에 따라 다른 형태로 꿈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 욕망인 리비도를 꿈이 완화해주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현상을 전치라고 하는데, 프로이트는 바로 이 전치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언어나 꿈 등 점점 기존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전면으로 가져와 구조주의를 말한 것이 레비스트로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적으로 드러난게 <슬픈 열대>입니다. 이 책은 레비스트로스가 직접 오지의 부족민들을 찾아나서며 그들의 생활상과 풍습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술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부족민들을 찾아 나섰을까요? 이는 그가 직접 언어와 꿈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체계를 찾기 위해서 였습니다. 기존의 이성 중심 구조주의 대신 야성의 구조를 포용한 새로운 구조주의 를 직접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구조주의는 크게 "야성은 무구조가 아니라 이성의 구조와는 다른 구조이다"라는 말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구조주의 대신 인류학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인류학은 본래 인종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뿌리가 백인우월주의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언어의 기원의 예시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언어에 대해서 생각해보려면 그 기원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하는데, 서양 언어를 거슬러올라가면 대개 라틴어에서 그 기원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라틴어가 언어의 기원이라는 생각이 이러한 기존 인류학적 사고를 대변합니다. 라틴어는 과연 어디에서 파생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흔히 불리는 '야만어'에서 고등언어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학의 대안으로 현재 학문으로 정립되어 가는 것이 인간학입니다. 인간학은 민족지학과 인류학의 한계를 넘어 민족우월성, 인종우월성을 타파하고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만 집중합니다. 시작은 칸트였습니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사유체계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칸트의 주장도 결국 인간의 우월성, 이성의 우월성으로 귀결되었고, 니체에게서 도덕적 페티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인간학의 방향은 인간이 왜 인간인지, 차이를 우월성과 신성으로 귀결시키려는 시도를 배제하려 합니다.
결국 구조주의는 단지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물음으로 확장됩니다. 구조주의를 통해서 우리가 단순히 '야만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새로운 가치의 가능성을 획득합니다. 이후에 책에서 다시 확인해보겠지만, 어느 누구도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신화가 사실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 성립되었다는 주장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고, 또 부족민들의 부락이 나누어진 기준에 대한 부락의 구조화, 하나의 감정표현에 첨가된 수많은 기의들을 확인하며 언어에 대한 구조화 등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신화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저술 '신화학'에서 구조는 원인과 결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과 배열 등의 속성도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신화도 다양한 속성을 가지는데, D.I.Y. 제품과 비슷하게 신화도 타 신화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요소들을 각각 다르게 조합과 배열, 원인과 결과등을 통해 다른 형태로 도출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전반적인 물음은 레비스트로스가 영향을 주고 받았던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도 드러납니다. 광기=격리의 식이 근대 이후에 생겨났다는 것, 그 이전까지 광기는 격리 대상이 아닌 보살핌이나 특별함의 대상이었다는 것, 따라서 사람들이 문제제기 하지 않는 광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를 어떤 인류애적 동기를 통해 정립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야만의 구조에 도달하게 된 것은 인류애적 동기 대신 철저한 사유때문이었습니다. 인류애는 동정심을 의미합니다. 동정심이 전체의 효용에는 이익이 될지 모르나 그 본질은 위계에 근거합니다. 내가 이 사람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이 내가 이사람을 구원해주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현실화되는 것, 그래서 니체적 힘에의 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인류애라고 레비스트로스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계를 짓는 생각이라면 야성의 구조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성과 야성의 위계를 동등하게 하고 기존의 위계를 전복시키려는 사유가 위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존재모순적이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의미있어 보입니다. 푸코는 보편에 매몰되면 당연함의 구조에 매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함과 보편성에 매몰되는 것은 새로운 지식과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나야"와 같은 주장은 당연함에 매몰되어 그 자체의 지식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 사유가 구조주의의 첫 발걸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