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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안토니 비버 -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투키디데스의 함정

역사는 되풀이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단일 전투입니다. 이 곳에 있었던 소련 병사의 평균 수명은 24시간이며 독일군은 7초에 한 명씩 죽었습니다. 이렇게 총 6개월동안 2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는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 질 수 있는가에 대한 명백한 예시를 전달해 줍니다. 우크라이나의 석유를 확보하려했던 독일과 이를 사수하고 러시아 서부의 공장지대를 사수하려는 소련의 이해관계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맞붙었고, 경제적, 정치적 의미가 담기게 된 순간부터 어느 누구도 이 곳에서 후퇴할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영국과의 '영국 본토 항공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서서히 소련 침공을 준비합니다.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었다고 하지만, '나의 투쟁'에서 독일의 주적을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로 규정한 나치 정권에게 조약은 임시방편이었습니다. 독일은 전쟁 전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하는 등 전쟁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단순한 훈련이라고 믿었으며, 믿고 싶어했습니다. 소련 지도부는 독일 주재 소련 대사관에 계속 정보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을 뿐, 구체적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전쟁 시작 후 소련 국경을 돌파하고 나서야 소련은 반격을 준비합니다. 독일이 거침없이 러시아 서부지대를 유린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할 무렵,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인공인 독일 6군은 스탈린그라드 주위의 곡창 지대를 향해 출발합니다. 1941년 12월 4일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에서 연기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합니다. 모스크바 남쪽은 모두 독일군이 점령했으며, 내륙 깊숙히 위치한 스탈린그라드도 서서히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드디어 스탈린그라드의 공장지대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였고, 6군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출발했습니다. "전쟁은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난다"라고 독일군 사이에서 소문이 돌아다녔으니, 실제로 독일군은 장기적으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2년 11월, 20만명의 소련군 공세를 시작으로 총 110만명이 독일군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25만명의 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갇혔습니다. 80만명에 달하는 독일군이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파울루스 장군의 서명 아래 제 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원 항복하게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제 2차 세계대전은 유사점이 많습니다.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해상을 장악하여 무역을 통해 떠오르는 아테네와 이를 불안하게 여긴 스파르타의 대결 구도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는 독일 제3제국과 영국,프랑스, 소련의 대결 구도는 신흥 세력과 기존 강자들의 구도로 치환됩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름을 따온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이론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신흥 세력과 기존 강자들은 필연적으로 대결 구도에 휩싸이게 되며, 대부분 이들은 전쟁에 이르렀다는 이론입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이론에 따르면, 근대 이후 총 16차례의 신흥국과 기존 강자들의 대결 구도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4차례를 제외한 12차례 실제로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15번째의 냉전도 베트남전과 쿠바 사태, 한국전쟁 등 다른 형태로 일어났고, 독일과 일본의 경우 세계대전 이후 군사력이 크게 제한되었음을 생각해보면 투키디데스의 이론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모두 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을 필두로 민간인 피해와 전쟁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투키디데스의 함정 이론에 부합하는 대결 구도의 전쟁 예상 규모는 예상이 불가한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투키디데스의 이론에 부합하다고 제시되는 대결 구도는 바로 미국과 중국입니다. 현재 무역분쟁으로 갈등이 커지는 중이지만, 이미 그 전부터 군사적인 신경전이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는 국가 패권주의와 맞물려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대결 구도가 종식될지 알 수 없으나 점차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세계가 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성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근대 이후와 이전을 분리했을까요? 이는 Raison d'etat라고 불리는 국가이성의 출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국가이성이 규정하는 국가적 이익에 따라 정치가 변화하는 지점의 시작을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와 독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결구도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합니다. 리슐리외는 프랑스의 명재상으로, 프랑스를 봉건제도에서 절대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기틀을 놓았다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나 특정 집단이 아닌 프랑스의 왕에게만 충성하였는데, 프랑스의 왕이란 곧 프랑스였기 때문에 리슐리외의 최우선 과제는 프랑스와 프랑스 왕의 영구적인 안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주위에 있는 국가 중 가장 위험요소인 국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독일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봉건적인 제후들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이들을 합친 영토와 인구는 프랑스를 넘어섰기 때문에 리슐리외는 독일을 영구히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후들을 이간질하고 뇌물을 통해 독일을 분리시켰으며, 종교를 이용하여 30년 전쟁을 일으켜 독일을 결국 크게는 반으로, 작게는 수십 개의 제후국으로 분리시켰습니다. 이것이 투키디데스 함정의 첫 번째 예시의 시작으로, 리슐리외 이후의 메테르니히와 루스벨트 등 정치가들은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고 자국의 이익을 가장 위하는 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Raison d'etat로 대표되는 국가이성의 허울을 폭로한 전쟁입니다. 국가들은 국가 스스로를 위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석유의 부족과 신시장 점유에 실패했습니다.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베르사유 조약의 체제가 명백히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국가이성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신흥국들의 영토 확장 금지와 신상품에 대한 관세는 신흥국들이 구체제 하에서 국가이익을 온전히 추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이익을 강자가 획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직 구체제가 점유하지 못한 영토를 식민지화하거나 구체제 산업과의 경쟁을 회피하였으나 구체제의 강대국들과의 국가이익 경쟁에는 열세였고, 그들의 국가이성이 공격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이성이 가장 파괴적으로 부딪혔던 곳이 스탈린그라드입니다. 스탈린그라드의 곡창지대와 산업지대를 파괴할 경우 독일은 러시아 서부를 온전히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석유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독일의 입장에서 스탈린그라드는 무조건 얻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도 이 곳을 잃을 경우 타격이 크고, 스탈린의 지배체제에도 영향이 생길 수 있어 스탈린그라드를 무조건 사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경우, 제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광기 어린 전쟁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정권에 세우게 만든 원동력은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의 추구에 있었고, 이들이 국가를 움직인 방향도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의 절대화에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국가이성이 극한에 이를 경우 얼마나 야만적인 결과가 발생하는지 보여줍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요,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이다" - 스탈린

"삶이란 뭐요? 삶은 곧 국가요. 개인은 어떻든 죽어야 하지 않소" - 히틀러


 국가이성이 가장 크게 부딪혔던 스탈린그라드에서 개인들은 파편화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현재 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나 독일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로 전향해 싸운 러시아인들의 수는 집계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탈영병들은 매우 많았고, 굶주림 등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쥐를 잡아먹고 메탄올을 마시고 눈이 멀고, 자해, 투항, 부패, 강간 등 인간의 밑바닥까지 이르렀습니다. 베를린의 의회 건물엔 2차 세계대전때의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라는 낙서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개인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신 파편화되었을 때의 파괴적인 결과가 앞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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