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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 슬픈 열대, 4주차

안과 밖의 경계의 불분명함에 대하여

제 3부

9장 구아나바라


 이제 나는 자유로이 걸어다니면서 리우데자네이루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우선 그 모험의 흔적을 식별해내고자하였다. 마침내 나는 한 일본인 학자를 기념하여 국립박물관이 주최했던 만의 한 귀퉁이에 대한 고고학적답사의 과정에서 하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략) 낮게떠 있는 구름과 새벽부터 뿌리는 가랑비 사이로 도시는 멀리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진흙에는게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홍수(열대의 강이나 바닷가에서자라는 교목-옮긴이)가 있었다. 이 나무들이 이처럼 크게 자라난 것은 성장 또는 퇴락의 징표인가?

- 보통 일반인이 20세기의리우데자네이루 해변을 바라보면 그 경치의 감상에 그쳤을 것이지만, 레비 스트로스에게 리우데자네이루 해변은서구사회에 의해 이미 오염된 브라질을 드러내주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관찰한 리우데자네이루 해변의홍수는 보통 열대우림에서 자라지 않는 종입니다. 이 홍수들의 특징은 열대우림이 황폐해진 이후 이차림(인간 간섭으로 일차림이 파괴된 이후 자라난 숲)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차림의 발달은 자연의 성장일까요, 아니면 일차림의 파괴를드러내는 퇴락의 징표일까요? 레비 스트로스의 문제의식은 비단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자연에도 미칩니다. 구조주의의 영향은 사회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자연에까지 미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여행을 공간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간의여행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 사회적 서열에서의 변화도 수반한다. 우리가받은 인상들을 적절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각각의 세 가지 요소를 서로 관련시켜야만 한다. 공간하나만 하더라도 세 개의 국면을 지니고 있으므로, 여행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다섯 가지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내가 대서양과 적도를 건너서 열대 부근에 왔다는 사실을 이 몇몇확실한 징표로써 알 수 있었다. 이 징표 가운데서 후텁지근한 열기는 내가 보통 때 입고 있던 모직물의옷을 벗게 하였고, ‘집 안’과 ‘집 바깥’이라는 구별을 없애버렸다.

- 레비 스트로스가 프랑스에서 브라질로 온 사실은 공간뿐만 아니라시간, 사회적 서열까지 바꾸었습니다. 우선 시간의 맥락으로볼 때, 레비 스트로스는 브라질로 오면서 브라질이 서구 사회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브라질이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여 이것이 근대적 발전관의 미래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기후와 건축에 연결이 되는데, 서구의기후는 춥기 때문에 ‘집 안’과 ‘집 밖’의 경계가 명확했습니다. 그러나기술이 발전하며 이 두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등장하였고, 이 대표적인 예가 유리를 사용한 아케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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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갈레리아스

 이렇게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을 유리로 메워 안과 밖의 경계를 넘으려는 노력이 서구사회에서 꾸준히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레비 스트로스가 브라질에 왔을 때, 브라질은 이미 안과 밖의경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브라질의 기후가 따뜻했기에, 사람들이건물의 문을 모두 열고 거리로까지 생활의 반경을 넓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레비 스트로스는 브라질이서구사회의 미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서열의 변화는 물가의 변화로, 이는 요새 해외여행을 통해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10장 남회귀선 여행

 10장은 레비 스트로스가 직접 체험하고 관찰한 지질학적 이야기와 화폐에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삼림은 잎과 줄기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유럽의 삼림과는 달랐다. 이곳의 나뭇잎은 유럽의 것보다 더욱 검고, 또 초록의 색조는 식물계보다는오히려 광물계와 더 가깝게 관련된 듯하였으며, 감람석이나 에메랄드보다는 경옥과 전기석을 상기시키는 빛깔이었다. 한편 흰색이나 회색을 띤 나무줄기들은 무성한 나뭇잎들의 검은 배경을 향해 마치 마른 해골처럼 서 있었다. 삼림 전체를 관망하기에는 암벽에 너무 가까이 있었으므로 나는 세부를 관찰하였다. 식물들이 유럽의 것보다 더욱 풍부하였고, 나뭇잎들은 금속 조각을베어낸 것처럼 그 모습이 당당하고 단단해 보였는데, 마치 시간의 시련으로부터 보호되어 의미가 가득 들어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밖에서 관찰해보니, 이지역의 자연은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과는 다른 서열에 속하는 것 같았다. 이 지역의 자연은 그 존재와영속성에 있어 보다 절대적인 것이었다. 앙리 루소가 그린 이국적인 풍경화들처럼, 이곳의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은 물체가 지닐 수 있는 준엄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 레비 스트로스가 느낀 신세계와 구세계의 자연의 차이점입니다. 자연이 보다 절대적이라는 뜻이 잘 이해가 가진 않았습니다.


 언젠가 나는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에서 수년 간 봉직한 뒤에 프로방스에서 첫 휴가를 지내는 중에 이와 동일한 종류의경험을 해보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무런 흥미도 갖지 못하였던 곳으로부터, 돌멩이 하나하나가 집의 단순한 구성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증인으로서 고고학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다른 곳으로갑자기 옮겨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략) 짙은 수지냄새가 나로 하여금 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식물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와 그 이유를 확신시켜주었다. 프로방스의식물상이 내게 냄새로써 증명하였던 것을 열대의 식물상은 그것의 형태로써 제시하고 있었다. (중략) 열대의 식물군은 거대한 무희들의 일단으로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모두 마치 인생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점을 보다 명확히 입증하기 위하여 그녀들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의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하나의 정지된 무용으로서, 땅속 아주깊은 곳에 있는 샘물의 광물성의 동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이 무용을 혼란시킬 수 없다.

- 레비 스트로스만의 사유법이 가장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개체의 준엄성에 집중하는 그의 사유법은 각 개별자를 구성을 위한 재료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통찰과 연구의 가치라고생각합니다. 따라서 프로방스에서 돌멩이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진 일화나,브라질에서 하나하나의 식물들을 관찰하고 이들의 구조를 찾아내려 하였던 레비 스트로스가 정말 일관된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경외감이듭니다. 특히 여기서 레비 스트로스가 느낀 수지 냄새를 통한 새로운 식물계는 실제로 원주민이 식물을분류한 구조입니다. 서구인이 식물을 분류하는 구조와 달리, 원주민들은식물을 알코올 함유량으로 분류하는데, 서구인이 이 구조를 처음 본다면 원주민의 구조를 매우 폄하합니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가 탐구한 결과 서구인의 식물 분류 구조와 원주민의 식물 분류 구조는 시작점만이 각자 달랐을뿐, 구조에서 파생되는 식물계는 모두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풍경은 전통적인 범주로는 분류될 수 없기 때문에, 유럽인 여행자들에게는당혹스런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손이 가해지지 않은 야성 그대로의 자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알고 있는 풍경이란 우리들의 욕구와 필요에 전적으로 복종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의 풍경이 때때로 야성적인 것으로서 우리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면,그것은 그 변화가 보다 완만하게 진행되거나 또는 문제들이 매우 복잡하여 인간들이 그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회답을 주지는 않고 세부적으로만그 문제들을 파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그대로의 자연, 일차림을처음 본 서구인들은 매우 당황스러움을 느낍니다. 서구인들이 알고 있는 자연은 인간에 맞게 가꾸어진 자연, 혹은 파괴된 자연이 조금 회복된 이차림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서구인이 일차림을 본다고 하여도, 그들은 일차림을 그 자체로 이해하기 보다는 과학실증주의의 영향으로일차림의 열등함과 문제점에 집중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아직 일차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메리카를 여행해보면, 우리들은 자연 그 자체의 자발적인 표현과는전혀 다른 이 같은 고귀한 조화가, 풍경과 그곳에 살고 있는 인간 사이에서 오랫동안 추구되어온 공동작업의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이처럼 소박한 풍경에 대해서도 찬탄을 금치 못하게 되는 것은과거 우리들이 실행해왔던 흔적들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10년 또는 20년 동안, 인간이그의 용도에 알맞도록 바꾸어놓으려고 노력했던 이 지역에는 하나의 새롭고 무질서하며 단조로운 식물군이 서서히 재생하고 있었다. 이 무질서는 그것의 순진한 표정 밑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기만적이다.뿐만 아니라 이 무질서는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투쟁들에 대하 기억과 윤곽을 완전히 보존해오고 있다.

- “풍경과 그곳에 살고 있는 인간 사이에서 오랫동안 추구되어온 공동작업의결과”가 레비 스트로스가 생각한 이상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이후에 인간 사회의 인구밀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등장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기위해선 이상적인 인구밀도와 이상적인 자연환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레비 스트로스가과거의 흔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레비 스트로스의 주장을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1장 상파울루

 11장은 상파울루와 상파울루 대학생의 사고체계에 대해서 다룹니다.


 어떤 독설가가 미국을 정의하기를 “야만에서 문명을 거치지 않고 퇴폐로옮아간 나라”라고 하였다. 이 정의는 오히려 신세계의 도시에더 어울리는 말인지도 모른다. 신세계의 도시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중간적인 단계를 거침이 없이 첫 생성기로부터 바로 노쇠기로 접어들었다. 내가 가르친 브라질 여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를 처음으로 방문하고 난 뒤에 상심하여 되돌아왔다. 그녀가 도시를 판단하는 기준은 청결과 백색이었는데, 거무스름한 건물들을지닌 파리는 그녀에게는 불결하고도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중간적인 단계를 거침이 없이 첫 생성기로부터 바로 노쇠기로 접어들었다”가 11장의 핵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상파울루라는 도시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상파울루에 사는 사람들의생각이며, 모든 신세계와 그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이 말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이고, 왜 이러한 생각으로 귀결되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아메리카의 도시들은 거대한 기념비들을 통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그와 같은 휴지 상태를보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도시의 주요한 기능을 초월한다거나 명상과 반성물의 존재가 되지 못한다. 뉴욕이나 시카고 혹은 상파울루에서 내가 감명을 받은 것은 ‘고대의잔존물’이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그 곳에하나의 적극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중략) 또 다른 13세기의 성당을 자신들의 수집품에 첨가할 수 없기 때문에 기분이 실쭉해진 유럽인 여행객들과는 달리, 나는 시간상의 후향적인 차원을 지니지 않은 하나의 체계에 나 자신을 즐거이 적응시켰으며, 하나의 새로운 형식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문명에 접하게 되어 즐거움을 느꼈다.만약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반대의 의미에서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들은 새로운 도시들이며 이들의 새로움이 바로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도시들이 영원하도록 새로움을 간직하지 못한데 대해서 용서하기란 어렵다.

- 신세계의 도시들이 생성기에서 바로 노쇠기로 접어든다고 하여 레비스트로스가 구세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레비 스트로스는 신세계의 도시에서 구세계가가지지 못한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발견한 새로운 형식, 적극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는 후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유럽의 도시들이 오래되면 될수록 그것들을 더욱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아메리카에서는 해가 지남에 따라서 도시에는 불명예스런 요소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아메리카의 도시들은단지 새롭게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최근에 만들어진 것일수록 더욱훌륭한 것이다. (중략) 유럽의 어떤 도시들은 천천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쇠퇴하고 있으나, 신세계의 도시들은 영원한 청춘을간직할 수 없는 하나의 고질과도 같은 계속적인 고열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 도시의 태동은 새로움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운명론적으로 새로움의 유지는 불가능하며, 이 반작용으로 소멸의길을 걷는데, 여기서 유럽의 도시들은 소멸의 길을 오랫동안 거치지만 신세계의 도시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1935년에 상파울루에서, 그리고 1941년에 뉴욕과 시카고에서 나를 우선 놀라게 한 것은 이들 도시의 새로움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초래하는황폐의 속도였다. 나는 이들 도시가 유럽의 도시들처럼 10세기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감명을 받은 것은, 그 도시들의 그토록 많은 부분이 벌써 50살이라는 나이를 먹었다고해서 저처럼 부끄럼도 없이 버젓하게 퇴색한 빛을 과시할 수 있을까 하는 사실이었다. 이 도시들이 지닌유일한 장식이 젊음이었는데, 그 젊음이라는 것이 이들 도시나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순간적으로 지나쳐버리는현상일 뿐이었다. (중략) 100년이 채 못 되는 이 수수한시카고의 모습이야말로 고대의 흔적을 여러 부분에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1천 년씩이나 된 우리유럽의 도시들에서는 이 같은 면모란 판단을 위한 하나의 단위조차도 될 수 없지만, 사람들이 시간이라는측면에서 사물을 생각지 않는 시카고에서는 이 같은 면모도 벌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 이러한 신세계 도시들의 특징은 곧 근대성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있습니다. 대량생산으로 인해 한 상품의 가치는 새로움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새로움이 곧 가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생산해야만 합니다. 여기서레비 스트로스는 신세계적인 생성의 끝없는 반복을 폄하하지 않고, 이러한 가치와 구세계의 가치가 합쳐져야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레비 스트로스는 신세계와 구세계의 우월성을 논하는대신, 이들의 특성을 각각 이야기만 할 뿐입니다. 이러한생각은 레비 스트로스를 포함하여 프랑스 철학자 및 예술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인데, 보들레르의 시를 통해서도느낄 수 있었습니다.

 완전무결한 원주(圓周)가있을 수 없는 것처럼, 절대적 이상(理想)은 어리석음에 불과할 뿐이다. 단일성만을 배태적으로 추구하는 어리석은예술가는 동일한 유형의 모방에 빠지게 마련이다.

-보들레르, ‘Salon de1846’, 출처 : penkal


 그 당시에는 상파울루 시가 추악한 도시로 알려지고 있었다. 시 중심가의커다란 건물들은 호화스러웠으나 구식이었고, 그 장식은 마치 점잖은 체하는 단조로운 설계로써 겉치레만해놓은 것 같았다. (중략) 상파울루 시의 건축에 나타난즉흥성은 건축학적인 타락이며, 모든 것이 도시 형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을 위해서급조된 외관만을 위한 건물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파울루는 단 한 번도 내게 추하다는느낌을 준 적이 없다.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도시들같이 야생의 도시였다.

- 서구사회의 시각에서 상파울루는 구세계의 도시를 모방하려는 추악한도시입니다. 상파울루의 외관만을 보았을 때 레비 스트로스도 상파울루의 조잡함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상파울루를 외관적 추악함만으로 단정짓는 관점은 시각의 경박성에 매몰된 태도입니다. 시각중심주의에서 벗어났을 때 레비 스트로스는 상파울루도 야생적인 마력을 지닌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상파울루가 끊임없이 도시의 구조마저도 변화하며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상파울루의 열대성 기후와 건축 등과 결합하여 특유의 역동성을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동성에 대한 묘사가 길었기 때문에 생략하였습니다.


 개화된 브라질 사람들은 개론서와 대중 보급용 저서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중략) 우리의 학생들은 모든 것을 알고자 하였으나, 가장 최신의 이론만이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과거의 지적 업적들은 전혀 모르는 채 그들은 ‘최신의 사물’에 대한 열광으로 일관해 있었고, 유행만이 그들의 관심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관념을 그 자체로서가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위세로써 그것의 가치를 판단하였다. 그 위세는 관념이 그들의 독점적소유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자기 급우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할 잡지나 안내서의연구에 서로 다투어가며 몰두하였다.

- 상파울루의 대학생들도 상파울루 도시와 같습니다. 그들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였고, 새로움을 가지는 것이 곧 우월성의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운명론적으로 새로움은 항상 사라지기에, 새로움이사라지면 우월성도 사라지고, 따라서 또다른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대중 보급용 저서와 개론서를 탐독했습니다. 오직 경쟁만을 위한 학문에 레비 스트로스가 얼마나 안타까움을 가졌을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파울루의 역동성에서 또 하나의 가치를 발견해 낸 레비 스트로스는 상파울루 대학생들의 사고방식에선 어떠한가치를 찾아냈다는 서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 경쟁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각자의실존이 관계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될 때 역동성이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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