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인에게 헌정하는 최고의 인사
1995년 12월 27일 판탱 묘지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떠나보냈다. 레비나스의 장례식에서 그는 오랜 친구이자 비판자였던 레비나스를 위해 이 조사를 낭독하였다. '아듀'는 정론의 흐름에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였던 위대한 개인에게 바칠 수 있는 최선의 인사였다.
개인의 철학과 신조는 인간의 방향성을 나타낸다. 이는 개인이 긍정과 부정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신념에 의해 특정 사건과 의견에 긍정과 부정의 가치를 대입할 수 있음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다. Nishilism에서 Nihil이 비존재가 아니라 무가치성임을 생각해보자. 독자적으로 가치를 생성하지 못하는 개인은 허무주의자이고, 연민할 뿐이다.
독자적으로 가치를 정립한 개인은 타인과 격렬히 투쟁한다. 가치는 사건의 중심적인 의미를 점유하기 위해 다른 가치와 필연적으로 대결한다. 개인의 투쟁이 아니라 가치의 투쟁이라고 서술한 이유는, 가치들은 감정과 특정 편향성이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투쟁과 대결이 편향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되는 반면, 가치의 투쟁과 대결은 개인의 본질을 담았으나, 이는 편향적이지 않은 순수한 기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으로 '독자적인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가치의 생성만을 의지하고, 그래서 편향적이지 않다.
서론이 매우 길었는데, 이를 통해 하고 싶었던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관계는 이와 같다.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가치는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비판적이다. 해체주의적인 큰 틀을 공유하였으나 이들은 서로 비판을 주고 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였다. 레비나스는 데리다를 헤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으며,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각각의 가치는 새로 생성되었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비판을 의식하고 자신의 가치를 더욱 발전시켰으며, 레비나스도 마찬가지로 데리다의 비판을 통해 가치를 더 정립하였다. 데리다-레비나스는 서로를 떼어놓고 존재할 수 없다. 평생을 학문적으로, 가치적으로 대립하고 비판하였으나 이를 통해 자신을 발전시킨 이들의 관계는 단지 학문적으로 깨달음을 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독자적인 개인'은 개인이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혼자만의 사유를 통해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와의 적극적인 상호작용, 진실에의 의지를 통해 가치를 정립하는 풀무질하는 대장장이, 불을 다루는 헤파이스토스, 간을 쪼아먹혀도 의지하는 프로메테우스이다.
자신과 순수하게 가치의 대결을 논했던 개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떠할까. 보통의 장례를 생각하면 조문의 장소에서 애도의 몇 마디를 던지고, 고인을 추모한 후 돌아간다. 애도는 불편한 일이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대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장소에서 할 말이 궁할 뿐이다. 모든 언어들은 예의바르지 못할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피하기 위해 발언들을 가로질러 가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인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넨다. 데리다의 조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아듀 레비나스.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는 행위는, 타자를 위해 말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는 올곧음(droiture)이다. 레비나스는 생전에 데리다에게 올곧음에 대해 말하였다. '탈무드에 대한 네 개의 강의'에서 레비나스는 올곧음이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떤 멋진 말은 아니다.
"순진함 없는 순수함, 어리석음 없는 올곧음, 자기에 대한 절대적 비판이기도 한 절대적 올곧음, 이 올곧음의 끝인 자의, 그 시선으로 나를 문제 삼는 자의 눈 속에서 읽힌 절대적 올곧음. 타자를 향한 운동, 초월을 감당할 수 없는 유희가 그렇게 돌아오듯, 자신의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는 운동. 염려 너머의, 그리고 죽음보다 더 강한 운동. 야곱의 본질인, '테미무스'라 불리는 올곧음."
여기에 레비나스와, 데리다-레비나스의 위대한 사유와 가치가 나타난다. 도리, 책임, 양심, 그 외의 어떠한 단어들은 올곧음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노래하고, 그 이후 죽음에 대한 성찰을 상기시킨다. 이 흐름은 플라톤부터 지금까지의 철학의 흐름과 반대된다. 레비나스는 타인과 함께 굳어진 윤리를 말하지 않고, 한 개인이 타인을 향하는 순간을 사유한다. 이는 윤리라는 단어와 같이 고정적이지 않다. '올곧음'은 본래 순수하게 타인을 향하고 위한다. 올곧음은 신성함, 우상숭배, 성경보다 더 초월적이다. 그리고 올곧음에 대한 성찰은 끊임없는 반성과 분리될 수 없다.
죽음은 타인의 응답 없음이다. 그런데 타인의 응답 없음은, 그 이전에 타인의 모든 몸짓이 나에게 전달된 신호라는 전제를 가정한다. 타인은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나에게 맡겨진다. 자신을 표현하는 타인은 나에게 맡겨진다. 따라서 나는 표현된 적이 있는 모든 타인에게 책임을 가진다. 죽어가는 타인의 죽음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책임을 이룬다. 데리다-레비나스의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존재론을 가볍게 받아들였던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타인과 나의 경계를 짓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존재론을 비판한다. 타자라는 관념은 자신과 경계지어질 수 있는가? '독자적'인 존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응답 없음은 단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 = 현대인들의 존재론이라는 등식이 생긴다. 현대인들이 가정하고 있는 존재방식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현대인들이 과연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다. 타자와의 관계는 환대, 책임, 존재이다. 존재를 규정하지만, 고정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레비나스는 다시 타자와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타자에게 책임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우리는 그 책임에서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책임을 긍정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예의 질서에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시작한다.
다시 아듀, 레비나스로 돌아오자. 아듀는 끝과 어떤 목적성이 아니다. 응답 없음을 초월하는 인사이다. 관계와의 단절을 선택하는 현대인들을 다시 타인에게 돌아오게 만드는 상징이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듯 그를 이름으로 부르면서. 아듀, 엠마뉘엘.
1995년 12월 27일 판탱 묘지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에게 그를 긍정하는 인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