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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y 31. 2020

위인의 전략 - 카이사르 (마지막)

로마의 망나니, 전략의 신화로 남다

역사에 길이 남았던 사람들의 커리어는 어땠을까? 그들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고, 어떻게 대처했을까?


적이 된 동료와 국가의 관직 박탈 명령


 우선 갈리아 전쟁이 끝난 이후 로마의 상황을 돌아보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로마에 남아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원로원 의원들이 나누어야 할 권력과 직책을 독점하였고, 그에 따라 막대한 군사들과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져야할 몫을 빼앗긴 원로원 의원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삭혀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평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시기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큰 공적을 쌓지 않았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자연스레 원로원 의원들의 음해 대상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돌아온다면 다시 정국을 잡게 될것이고, 원로원 의원들의 권리와 권력은 더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덜 위협적이라고 예상된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게 되었다(크라수스는 몇년 전 전쟁에서 패해 죽었다).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와 집정관에 취임하는걸 막고, 그의 세력을 줄이자는 제안이었다.

원로원 최종권고

 여기서 폼페이우스가 그들의 제안을 거부했다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동료로 남아 몇년 더 정국을 주도했을 것이다. 아직 그들 사이에서의 마찰도 없었고,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폼페이우스가 그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큰 공적을 세우자 폼페이우스도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하였다. 자신보다 밑인줄 알았던 카이사르가 단독 정권을 수립한다면? 카이사르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폼페이우스도 삼두 정치를 지속해야 한다는 마음이 약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폼페이우스도 원로원 의원들에 동조하여 로마에 돌아오는 카이사르에게 최종권고를 날린다. 카이사르의 모든 권한(갈리아의 지배자, 군대의 지도자)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최종권고가 나온 이상, 카이사르가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때까지의 로마 역사 중, 최종권고를 어긴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원로원은 로마의 헌법적 존재였고, 그를 어긴다는 것은 로마를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위대한 장군들도 최종권고를 무시하지 못하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누구인가.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항상 살 길을 찾던 사람이 아닌가. 최종권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격분에 가득찬다. 국가적인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지는 못할 망정,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는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결정을 내린 원로원의 무책임함과 결정의 빈약한 근거를 지적한다. 그는 또 생각에 잠긴다. 어차피 원로원은 최종권고까지 내린 이상, 자신에게 칼을 거두지 않는다. 폼페이우스도 자신을 버리고 원로원과 결탁하였다. 나는 원로원에 반기를 들 수 밖에 없다.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카이사르는 군대를 데리고 루비콘 강을 넘는다. 모든 로마의 군대는 루비콘 강을 넘으면 안된다는 법이 있었기에, 그는 로마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로마로 가지 않고 남하하기 시작한다. 왜 카이사르는 로마로 가지 않았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로마의 법과 지리를 이해해야 한다.

루비콘 강을 넘은 후 카이사르의 이동 경로

 로마의 법에 따르면, 루비콘 강의 남쪽에는 군대가 없어야 한다. 이 말은 곧 폼페이우스와 로마 원로원도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폼페이우스는 매우 당황한다. 군대가 없는 로마에 있으면, 카이사르가 쳐들어와도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폼페이우스는 즉시 도망가 이탈리아가 아닌 곳에서 저항하기로 결정한다(이탈리아에 소규모 부대들은 있지만, 이들은 카이사르에 맞설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 부근에 있는 군사 항구는 브룬디시움이라는 곳이었는데, 이곳이 로마에서 꽤 멀다는 점이었다(브룬디시움은 사진의 Corfinium 동남쪽에 위치한다). 


 카이사르도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에 머무르지 않을 것, 그들은 브룬디시움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로마를 주된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최우선적으로 브룬디시움을 폼페이우스보다 먼저 장악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길목에 있는 소도시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아군을 키워가면서, 점점 브룬디시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도주와 카이사르의 대전략


 길목에 있는 소도시들이 모두 카이사르에게 붙자 폼페이우스도 더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도망만을 생각하였고, 그 결과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데리고 먼저 브룬디시움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편지를 보냈으나, 이미 그는 브룬디시움에서 배를 타고 발칸반도로 도주하는데 성공한 이후였다. 닭 쫓던 개가 되자, 카이사르도 그제서야 로마로 향한다. 정치적인 권위를 모두 얻고,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꺾자는 생각이었다.


 브룬디시움을 함락하고 로마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집정관에 취임한다. 껍데기만 남은 로마를 장악하였지만 그의 앞에는 장애물이 가득하였다. 스페인-이탈리아-발칸반도-아프리카(튀니지)-동방(이스라엘, 시리아)로 이어지는 로마의 국토 중,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폼페이우스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안전한 발칸반도에서 로마의 인재들을 데리고 그를 침략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진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이 필요했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결단을 내린다. 곧바로 폼페이우스를 치지 않는다. 폼페이우스의 관할에 있는 다른 지방들(스페인, 아프리카)을 내 편으로 돌린 이후에 폼페이우스와 싸워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왜 그랬을까?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서, 타 지방들에 별다른 부대를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래도 카이사르의 부대보다는 많았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발칸반도에 머무르며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카이사르는 발칸반도로 가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우여곡절 끝에 스페인을 평정한다(아프리카는 부관의 자만심으로 인해 탈환하지 못한다). 폼페이우스가 지방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하기 이전에 자신의 부대를 먼저 보내 점령하게 한 것이다. 최고 수준의 경력과 전투력을 자랑하는 군대와, 백전노장들이 뭉친 휘하 장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업적이었다. 이제 카이사르에겐 한 목표만 남아있었다. 바로 그리스에 머물며 1년동안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폼페이우스 였다.


적의 핵심 역량을 묶어둘 비장의 무기, 폼페이우스와의 결전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그리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기려고 해상 봉쇄 카드를 꺼냈으나, 카이사르가 모든 이의 예상보다 빠르게 바다를 건너 이를 무력화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공격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두 장군은 모두 지원군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각자 지원군이 합류한 이후, 두 부대는 일정 간격을 둔 채 조용히 대치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 두 장군의 격차는 다음과 같다. 


폼페이우스 : 보병 45,000명, 기병 7,000명, 바로 이전 전투의 승리

카이사르 : 보병 22,000명, 기병 1,000명, 바로 이전 전투의 패배


 이것만 보면 카이사르가 왜 폼페이우스에게 싸움을 걸었는지 의문이 든다. 수도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이전 전투까지 진 카이사르가 왜 정면 승부를 걸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선 예상되는 미래 상황을 그려보아야 한다. 카이사르가 스페인, 이탈리아 지방을 장악하였으나, 폼페이우스의 발칸반도, 동방 지방에 비해선 경제력과 인구 규모가 열세였다. 장기전이 될 경우, 카이사르가 더 불리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카이사르가 적의 지역에 들어와있으니, 식량과 군자금을 확보하는것도 시간이 지날 수록 불리해지는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이에 기반하여 적이 더 강해지기전에 승부를 보아야한다고 결론내렸던 것이다.

파르살루스 전투의 배치도. 아래 직사각형 4개가 폼페이우스의 부대, 위 직사각형 3개가 카이사르의 부대이다.

 막상 정면 승부를 신청하였지만 그래도 카이사르가 절대적 열세임은 부정할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이 때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 돌아보았다. 그것은 바로 적은 기병이었다. 기병은 우리 군대가 포위당하지 않도록 측면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7배나 더 많았기에 전투가 시작되면 측면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기병을 어디서 데려올 수도 없었기에 카이사르는 특단의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특단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적이 자신의 핵심 역량을 활용하는 예상 진로에 함정을 파는 것이었다. 기병의 병력 수가 7:1이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카이사르의 측면(카이사르의 기병이 방어하는 부분)을 공격할 것다. 병력 수가 월등하기 때문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병은 창병이 창으로 찌를때 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병들 뒤에 창병을 숨겨놓고, 적의 기병이 도착하였을때 갑자기 창병이 튀어나온다면? 기병들은 창병을 매우 두려워하기에 도망갈 것이고, 오히려 적의 측면이 위험해질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신들의 보병이 상대 보병과 대치한다면 여기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바로 실행에 옮긴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대치하였다. 조심성이 많은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함정에 들어오지 않을수도 있기에, 카이사르는 먼저 자신의 군대가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보병들끼리 부딪혀 싸우기 시작했지만 어느 한쪽도 서로를 압도하지 못했고, 카이사르가 먼저 쳐들어오는것을 보자 조심성이 무뎌진 폼페이우스는 드디어 기병을 출격시켰다. 호기롭게 돌진한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이 카이사르의 기병들에게 도착할 무렵, 카이사르의 기병들 뒤에서 한 무리의 군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카이사르의 밑에서 10여년 동안 경험을 쌓았던, 고참병들이 창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잔뼈가 굵은 병사들이 창을 들고 나오자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했고, 심리적 혼란이 가중되어 갑자기 모두가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찰나에 폼페이우스의 측면이 뚫리자 카이사르는 이걸 놓칠리 없었고, 전 부대를 측면에 집중시켜 폼페이우스를 포위하자 폼페이우스의 부대들은 패닉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심리적 불안감까지 극대화시켜 적의 약점을 노출시킨 전략의 승리였다.


신화가 된 카이사르와 못 다한 꿈

암살당하는 카이사르. 주황색 옷이 카이사르이다.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꺾고 모든 로마의 지방들을 장악한다. 로마 원로원도 자신에게 굴복하였고, 드디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는 활발하게 정책을 내놓고 정치 활동을 수행한다. 그러나 점점 자신들의 지위가 약화되고 독재자 카이사르가 출현하게 되자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 너마저"와 함께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는 숨을 거둔다.


 항상 열세였음에도 강점을 극대화하고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던 그였지만,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이 타인에겐 최악일 수 있음을 간과한 죽음이었다.


다음 시리즈는 나폴레옹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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