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 촌뜨기의 파리 상경, 출세기
역사에 길이 남았던 사람들의 커리어는 어땠을까? 그들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고, 어떻게 대처했을까?
영웅들은 대개 승리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기를 읽으면 대개 적을 정복하거나 승리를 거두는 채로 끝나고, 영웅들은 막대한 명예를 얻으며 끝난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폴레옹은 평범한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은 패배한 사람. 자신의 숙적(호레이쇼 넬슨, 아서 웰즐리)을 꺾지 못하고 좌절해야만 했던 사람. 대서양의 외딴 섬으로 쫓겨나 비탄에 잠겨 죽음으로 돌아간 사람. 나폴레옹의 삶은 가시밭길을 걷는 거인과도 같았다.
나폴레옹만큼 역사상에서 논란이 되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먼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든 강대국을 적으로 돌리면서도 이겨낸 군사적 재능, 오늘날의 법 체계를 만들어낸 행정적 지식, 체계적인 정부와 교육 체제를 구축한 능력을 칭송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적인 리더가 맞다. 그 이전까지의 국가와 리더들은 모두 구체제(앙시앙 레짐)에서 순응하고, 질서를 유지하려 했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트렌드가 변화함을 인지하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이를 거부하였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나폴레옹이 처음 정립해낸 전략들은 각각 군사학, 정치학, 법학 등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반면 나폴레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어떠할까? 그들의 눈에 나폴레옹은 구체제의 리더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저급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을 키워준 환경(프랑스 혁명)을 배신하고 황제가 됨으로써 결국 자신이 욕하던 남들과 다를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강대국들을 적으로 돌려 조국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폴레옹은 폭력적인 미치광이 지도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서 양측이 모두 인정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역사는 나폴레옹 전후로 극명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우선 나폴레옹이 강대국들을 상대로 승리하고,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온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만들어낸 법전은 너무나 뛰어났기에 이후 모든 법들이 이를 참고하여 제작되었고, 나폴레옹의 군사전략은 이후 현대의 군사전략의 기틀이 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폴레옹을 이기고 다시 왕을 복귀시킨 강대국들도 그가 만든 국제정세와 체제에 순응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타도하고자 했던 나폴레옹이었지만, 역사의 거인 앞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순한 양과 같았다.
이렇게 역사에 족적을 남겼던 나폴레옹은 1769년 프랑스의 외딴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의 집안은 섬 내에서 알아주는 가문이었지만, 코르시카 자체가 프랑스에 합병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출세에 있어 좋은 가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의 집안이 그에게 줄 수 있었던 특혜는 사관학교 입학이 전부였는데, 이는 변변치 않은 귀족가문들이 으레 하던 코스였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의 집안은 조금 잘사는 중산층이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셈이었다.
처음부터 뛰어난 경력을 밟아가는 영웅들이 많으나, 나폴레옹은 그렇지 못했다. 사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것도 아니었으며 군대 내에서 엄청난 전략을 입안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한 군인으로 커리어를 마감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폴레옹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세계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프랑스 혁명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어 왕이 축출되고 혁명정부가 들어섰다. 이때 나폴레옹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코르시카로 내려가있었는데, 4년가량 큰 족적없이 시간을 조용히 보낸다. 아마도 프랑스 혁명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터닝포인트가 될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기회를 잡으려는 모든 사람들은 파리로 올라와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코르시카에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집안이 파리로 상경하게 되었고,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굵직한 사건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는데 직위가 낮아 어떤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폴레옹은 이 때 프랑스 혁명의 상황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상해보는 칼럼, '보케르에서 저녁식사'를 작성하였는데, 사회적 파장은 일으키지 못하였으나 높은 사람의 눈에 띄였다.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이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전적으로 남의 도움을 받아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중앙 파견의원, 내각 권력자 등으로 이어지는 나폴레옹의 인맥 명단은 그에게 막대한 특혜들을 안겨준다. 자신의 상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파면시키고, 하급 지휘관으로서 닿을 수 없는 권위를 손에 얻는 등 월권행위를 일삼는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다. 도대체 왜 외부 인맥, 실력자들은 보잘것 없던 나폴레옹의 뒤를 그렇게 봐준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나폴레옹의 인맥 이전 상태와 인맥 이후 상황을 알아야 한다. 족적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사관학교에 입학했던 나폴레옹은, 어렸을 적부터 자기 자신만의 지휘 철학과 전략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우선 야사에 드러난 나폴레옹을 보면 사관학교 시절 나폴레옹은 공부에 완전히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였으나, 전쟁 장난과 같은 상황에서는 실제로 지휘를 도맡아하는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야사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지는 않으나, 나폴레옹이 어느 정도 지휘 능력을 키워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근거는 나폴레옹이 유망한 커리어에 진입한 이후의 행적을 보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당시의 패러다임에 반하는 전략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포병을 전략의 핵심으로 끌어올리는 전략이었는데, 인맥을 통해 출세한 직후부터 이러한 전략을 펼쳤음을 보면 나폴레옹이 이미 전략론을 구체화시켜놓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은 실력자들도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게 할 정도로 역량을 쌓아놓았던 것이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중 자신을 후원하던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기도 하며 우여곡절을 겪지만, 나폴레옹은 점점 자신을 역사의 큰 인물로 올려놓아가고 있었다. 이 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프랑스 혁명에서 박해받던 왕당파가 국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라 3만여명의 대규모의 훈련된 쿠데타 집단이 등장하자 프랑스도 위기감을 느꼈다. 다급히 쿠데타를 진압할 지휘관을 임명해야 하는데, 임명된 지휘관이 바로 나폴레옹을 후원하던 실력자 바라스였다. 그리고 지휘관으로 출세하고 있지만 확실한 공적이 없던 나폴레옹에게 덜컥 큰 권위가 떨어진다. 현장을 직접 지휘하고 쿠데타를 막아내는 현장지휘관이었다.
방데미에르 사건이라는 쿠데타에서, 나폴레옹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깨달았다. 즉, 쿠데타를 완전 진압하면 국민적 인기와 관심이 쏠릴 것임을 알았다. 이를 위해 파리 외곽에서 직접 대포를 공수하기도 하며 철통방어를 구축한 그는, 쿠데타를 강경진압하며 소탕한다. 대규모적인 쿠데타를 완벽하게 막아내자 전국민의 관심은 파리의 현장지휘관에게 쏠렸고, 나폴레옹은 단숨에 인맥을 뛰어넘게 된다. 바로 이전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을 분석하면서 쿠데타를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전략을 세웠던 나폴레옹의 군사적 역량이었다.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나폴레옹은 결국 통령(대통령과 비슷함)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인생의 숙적이 갑자기 등장한다. 호레이쇼 넬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