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작가가 되었다.
코로나가 유난히 심하던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엄마 혼자 감당해야 하는 대학병원으로 보내지 말고 집에서 모시자고 의논했다. 그 당시 가족 면회도 되지 않아 병원에서 혼자서 쓸쓸하게 세상을 뜨시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자녀들이 오기를 기다리셔서 가까운데 사는 우리 남매들은 매일같이, 먼데 사는 동생들은 주말에 방문하였다.
엄마는 밭에서 가져온 채소를 다듬고, 아버지는 키위나무 아래 평상에다 등받이 의자에 쿠션과 두툼한 방석을 깔고 앉아 발 받침대를 만들어 부은 다리를 얹어놓으셨다. 나무에는 라디오를 걸어두어 심심하지 않게 보내던 두 분의 시간은 봄처럼 짧았다.
아버지의 병환은 하루는 괜찮다가 이틀째는 아프고, 아침에는 괜찮은가 싶으면 저녁에는 잠을 못 자고 통증의 주기는 짧아지고 통증완화제와 패치를 붙이면 부작용으로 고통스러워하셨다.
더운 여름을 아버지는 노환과 싸우고 우리는 아버지의 고통과 싸웠다.
밤마다 “같이 살다 같이 가자.”라고 맹세하던 부모님이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란 걸 아신 건지 어머니 더러
"당신은 아이들하고 재미있게 더 살다 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두 분이 그렇게 이별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걸 들었다. 아버지의 부은 다리를 주무르면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삼켰다.
온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던 매미는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고 귀뚜라미의 세상이 왔다. 아주 청명하고 시원한 가을이 되어 긴 추석 연휴를 맞아 온 가족이 모이고 친척들도 병문안을 다녀갔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좋은 날 좋은 시’에 아버지는 '짚불처럼' 그렇게 고요히 가시었다.
친정집 대문 밖에 서 있는 오래된 은목서에서 진한 향기가 퍼지면 나도 몰래 '아버지!'를 부른다.
**유튜브 대학에서 전자책 쓰기 수업을 듣고 있었다. 강사는 무조건 쓰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였다. 아버지를 보면서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향해가는 다양한 모습을 전자책에 담아 보기로 했다. 어릴 때는 죽음을 몰랐고 나이 들어서 보는 남들의 죽음은 쉽게 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딸에게 전자책 이야기를 했더니 '브런치'에 올리는 것이 낫다고 나를 압박했다. 나는 일기조차 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글을 써서 어딘가에 내어본 적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나의 부족한 글이 아버지의 도움인지 운 좋게 ‘브런치 작가 등단’이라는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작가로서 벌써 4년이 다 되어 가는데 겨우 글 26편이 발행되었다. 나태지옥감이다.
글에도 때가 있음을 알겠다. 써야지 하고 서랍에 쟁여 두었던 글들이 시간이 지나니까 쉬어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버지께서 주신 '작가'라는 이름을 허명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