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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의 첫 누드?

올드 뮤지엄에서

by 해인

안녕?



너 알다시피 내 별명이 나무늘보, 춘향이, 거북이가 말하듯이 나는 슬로 슬로, 쉬엄쉬엄 누워서 뒹굴면서 책이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 듣거나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잖아. 그런 고로 과하게 활동적인 것은 한두 번 정도지 매번 하는 것은 힘들어하잖아. 또 겁이 많아 주사나 뾰족한 것도 무서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운전도 아는 곳만 가는 겁쟁이고 웬만하면 사람 많은 곳에는 안 가려고 하고 피하는 편이지. 물론 내가 좋아하는 곳에는 꼭 가려는 고집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정도로 무심한 듯 게으르게 사는 나에게 타이트한 브리즈번의 일정은 아무래도 무리 같아.


하지만 오늘은 아주 특별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어.

"뭐냐고?"

"응, 바로 누드 크로키!"

ㅎㅎㅎ 은근슬쩍 괜한 기대를 하게 되더라고. 실상은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라이프 드로잉이라고 하는데 누드라는 느낌이 주는 묘한 긴장감이 벌써

느껴지는 거야. 수업시간에 맞춰 가려면 마냥 늑장을 부릴 수도 없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지.

애나는 코로나 전까지 라이프드로잉(누드) 수업에 참석하면서 언젠가 같이 해보길 바랐어.

이번 나의 여행 일정에 맞춰서 드로잉 수업을 찾아보고 예약을 해놓았다고 하는 거야.

실제로 누드모델을 앞에 두고 크로키를 하는 것은 처음이니까 조금 설레는 맘도 있고.


12시에 시작하는 라이프드로잉 끝나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면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기에 과일 한 접시와 견과류 넣은 그릭요거트와 브루스케타를 먹었어.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어제 먹은 것은 소화가 다되었고 내 집에서는 사과 한 개와 집에서 만든 두유 한 컵이면 충분한 아침인데, 그 많은 걸 먹는 우리가 대단해.

그래서 그런지 친탁을 해서 평생 살이 찔 것 같지 않던 딸이 통통 족인 외탁으로 변하는 걸 보니 역시 먹는 것에 달렸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ㅎㅎㅎ.


올드 뮤지엄까지 가려면 10분 정도 걸어가서 버스 터미널에서 그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간다네.

날씨가 더워지는 거 같아서 양산을 쓰고 싶어서 챙겼는데 쓰지는 못했다(정말로 거기는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어쩌다 눈에 띄게 한 두 사람 보였는데 동양인이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가끔 하는 기침 때문에 마스크를 썼지만, 거기서는 괜히 많이 아픈 병자라고 생각한다는 일반설이 있다네. 그나마 코로나 이후에는 마스크를 써도 크게 의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전에는 마스크와 안경을 같이 쓰면 밤손님 혹은 그 이상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쩌겠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여기서는 여기만의 생활에서의 그게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모자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걸어가는데 더워 죽는 줄 알았어. 그나마 다행히 Old museum까지

버스 속에서 휴식을 취했지. 주말이고 날이 좋아 그런지 사람들도 많이 나와서 걸어 다니는데 다들 맨얼굴에 다니는데 얼굴이 따갑지 않은지 참 신기하기도 하더라. 나는 얼굴이 따끔거려서 혼났는데...

우리 애나도 얼굴에 주근깨가 엄청 생겼더라.

올드뮤지엄 옆문 쪽 전경


30분 정도 지나 올드뮤지엄 맞은편에 내렸는데 이름처럼 멋진 오래된 건물이 보이는데,

길을 건너서 올드뮤지엄 정문을 찾아 들어가서 라이프 드로잉을 한다는 노란 문의 건물을 찾아 한 바퀴를 돌아도 보이지 않았어. 올드뮤지엄에서는 바이올린, 첼로 등 오디션이 있다고 적혀 있고, 어디선가 악기 연습을 하는지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어. 우리는 그 노란 문의 건물을 찾아 숲을 헤매다가 어떤 키가 큰 중년 남자를 보고 애나가 물어봤어. 다행히 그 사람도 라이프 드로잉한다면서 우리 보고 따라오라고 하여 그를 따라갔어.

오래된 건물 앞에 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입구로 가까이 가보니 노란 문이라더니 옅은 미색의 문이 보였어. 아마 올드뮤지엄의 부속 건물의 하나인 창고를 그림 하는 사람들이 공유공간으로 쓰는 거 같았어. 우리는 마주 보고 웃으면서 들어가니 십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스케치북이나 미술도구를 펼쳐놓고 있었어. 높은 층고의 낡은 건물 여기저기에 조각작품들도 있고, 벽에 붙여놓은 드로잉 작품들도 보였어. 호스트인 듯한 회백발의 늙수그레한 남자가 우리에게 일본인들이냐고 묻는 거야. 코리아라고 했더니 자기는 작년에 6개월을 일본에 있으면서 작업을 하고 왔다고 하더라. 조금 젊은 사람들이 세 사람 정도였고 나이를 가름하기 힘든 브라운 칼라의 피부색의 젊은 여자분은 아크릴 물감으로 색감을 넣으면서 드로잉을 하는데 얼핏 보니 자기만의 개성이 느껴지는 작품을 하고 있었어. 애나 옆의 남자는 오일파스텔을 쓰는 거 같았어. 우리는 4B연필과 A4 스케치북을 가지고 갔는데 다른 분들은 콩테나 아크릴, 유화 물감이나 파스텔등의 다양한 재료로 자신만의 개성으로 표현하더라. 우리 건너편 쪽의 은발의 할머니는 이젤을 세워놓고 서서 작업을 하는 게 보였어.


라이프드로잉 브레이크 타임 중에

가운데는 밝은 얼굴에 예술적인 화장을 하고 머리에 화려한 붉은 깃을 꽂은 키가 큰 모델은 우리를 보고 활짝 웃는데 인상이 좋더라. 잠시 후에 검은 가운 같은 원피스를 벗는데 내가 더 긴장되더라. 모델이 옷을 벗고 스테이지에 올라가는 동안, 삼면으로 둘러싼 스무 개가 넘는 눈동자가 모델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어. 어느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선풍기 몇 대만이 그 정적의 시간을 깨우고 있었어.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걸 아는 모델은 조금 긴장하는 듯 보였지만 침착한 미소를 유지한 채 자세를 잡기 시작했어. 많은 이들 앞에서 누드로 있다는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으로 느끼며.ㅎㅎㅎ. 호스트가 곧 시작 타임을 알렸고 하얀 피부의 육감적이고 프로페셔널한 모델의 포즈를 감상할 틈도 숨 쉴 틈도 없이 눈과 손을 움직여야 했어.

드로잉을 하는 숨 막히는 10분 동안 한 자세에 쥐가 나는지 고개를 조금씩 움직이기도 하고 들린 팔을 약간 떨기도 하고 짚고 있는 손이 저린지 오므렸다 폈다 했어. 누구라도 같은 자세를 1분도 채 하기 힘들 텐데 전문모델은 다르다 싶은 거 있지. 몇 번의 10분을 , 나중에는 30분으로 종료하고 브레이크 타임으로 넘어갔어. 나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긴장한 탓인지 끝나자 큰 한숨이 나오면서 우스웠어.

브레이크 타임에 간식을 먹고 모델이 우리에게 와서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고 폰으로 찍어가고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나마 재미있었어. 자신은 모델을 시작한 지 5년이 되었고 결혼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그림도 찍고 자신의 SNS에 올리고 광고를 하는 듯 보였어.

모델을 앞에 두고 하는 크로키는 처음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그리기가 어려웠어.

조금 긴장하고 당황했지만 확실히 또 다른 재미가 있는 거 있지. 그림을 하고 싶은 욕구가 막 샘솟는 거야.

ㅎㅎㅎ.

몇 번을 더하고 수업이 끝나자 호스트가 다음 주에도 라이프드로잉 있으니 신청을 하라는 거야. 애나는 엄마가 한국에서 와서 여행 중이라 시간이 안 될 거 같다고. 나도 오래 있을 거면 같이 하고 싶다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기회로.



우리가 번화가인 시티로 넘어가니 웬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브리즈번 사는 사람들이 다 모었나? 온 세상에서 온 듯한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그곳을 점령한 듯이 많은 거야. 혹시나 하고 나는 크로스로 맨 가방을 앞으로 해서 꼭 붙들고 한 손은 애나손을 잡았지. 애나는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도둑 나무라지 말고 내 것은 내가 알아서 지켜야 해."면서 가방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어.ㅎㅎㅎ. 사람 많은 곳에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니까.


퀸즈플라자 백화점(데이빗존스) 윈도우 쇼핑을 하면서 중국레스토랑 롱타임에 들어갔어. 점심 이후의 조금 한가한 시간이었지만 띄엄띄엄 손님들이 앉아 있고, 우리는 생맥주에 딤섬과 샤오롱바우를 시켰어. 긴장 속의 드로잉 수업, 더운 날씨 탓인지 한가한 느낌과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옆 테이블에 한국말이 들려서 쳐다보니 딸이 여행 온 부모를 모시고 와서 식사를 주문하는 게 보였어. 우리는 천천히 늦은 점심을 즐기고 볼거리가 많은 곳에서 명품들 실컷 눈요기만 했지. 애나는 엄마가 필요한 거 하나 사라고 부추겼지만

"노노..." 나도 꼭 필요한 거라면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 거 같아. 해질 무렵까지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애나의 회사에 들르기로 했어. 딸이 근무하는 사무실 작업환경도 보고 애나의 벽화작품도 보았어. 우리 딸이 먼 이국 땅에 와서 낯선 이들과 경쟁하며 살아내는 것이 기특하여 콧등은 시큰해지고.

애나의 작품으로 된 사무실 벽화


낯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고 거리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긴 행렬로 오가며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가봐. 해가 길어지는 여름이 가까워지니 날씨가 너무 더웠어. 최고 기온이 32도라고 하는데 이제부터는 더 더워지겠지.

아이고 무셔워 빨리 가서 쉬고 싶어. 오늘의 일정 보고 끝.


너도 잘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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