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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소방 사이렌

75층 호텔에서

by 해인

잘 있지?


위기의 한밤을 이야기해 줄게.


골드코스트에서 있었던 일이야.

재미있으면서 피곤한 날들이 계속되는 중이었지.

내 방에서 보는 한밤중 시티뷰.

화려한 불빛들도 어느덧 깜박깜박 조는 듯했어.

Meriton Suites Surfers Paradise에서 본 City View


여행의 피로로 기침감기는 더욱 심해지고 매시간마다 콜록거리며 잠을 깼어.

일어날 때마다 루틴처럼 소금 가그린, 따뜻한 물 마시기, Vt.C 복용, 가루 용각산 털어 넣고,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를 목안에 뿌려주고, 코 막혀서 지르텍도 뿜뿜 하고.

목에 스카프를 감고 침대에 눕는데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어.

호텔 침구를 좋아하지만 감기기운이 있다 보니 차가운 침대시트와 이불 감촉이 싫은 거 있지.

여름 잠옷 속에 긴팔 면티를 입고 큰 타올로 몸을 감싸고 이불을 덮으니 온기가 느껴지니

저절로 눈이 감기는 거야.


피곤한 탓에 금방 잠이 들었나 봐.

채 한 시간이나 되었으려나.

갑자기 소방사이렌이 쉴 새 없이 고막을 때리기 시작했어.

"엥? 어디서 불이 났나?"

우리는 깜짝 놀라 각자 방에서 튀어나왔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무슨 일이야?"

"어디서 불났나?"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어.

그러는 중에도 소방사이렌은 볼륨 9-10 정도의 데시벨 크기로 끊임없이 울려댔어.

방 전화기 벨도 덩달아 울리고.

애나는

"엄마, 밖으로 나오라는 건가 봐."

우리는 잠옷에다 카디건을 걸치고 전화기만 챙겨 슬리퍼를 신고 뛰어 나갔어.

복도에 나와도 사이렌은 계속 울렸어.

혹시 불길이나 만나지 않을까 몹시 긴장을 하면서 두리번거렸지.

다행히 복도에 연기나 타는 냄새가 나지는 않았어.

"75층 호텔에 29층인데 몇 층에서 불이 났다는 거지?"

"왜 복도에 사람들이 안 보이지?"

"우리가 조금 늦게 나왔나?"

"화재경보 소리를 못 듣고 룸에 그대로 있는 건가?"


내가 여행 왔다가 여기서 죽는 건가?

지은 지 2년도 안된 전망 좋고 시설 좋다는 호텔에서 죽다.

세계의 뉴스를 장식할 거고.

우리나라에서도 보도하면서 한국인 여행객은 어쩌고 저쩌고..

또한 우리 가족들은 얼마나 놀라서 비탄해 할까.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묵은 층이 29층인데 화재가 났다면 엘리베이터 타도 되나?"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려면 엄청 힘들 텐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깐의 고민을 했지만 무서워도 어쩔 수 없었어.

아무도 보이지 않고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엘리베이를 탔어.

애나의 손을 꼭 잡고 콩닥거리는 가슴을 겨우 붙들고 로비로 내려가는데 별일 없이 무사히

도착하였어. 로비에는 몇 팀의 가족들과 연인들이 긴장한 얼굴빛을 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대피한 인원은 적었고 그들은 소파에 앉아있거나 서서 호텔의 조치를 기다리는 듯 보였어.


세 개의 프런트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호텔 프런트에는 아무도 없었어.

왜 화재경보가 울렸는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거야.

'뭐 이래? 이렇게 큰 호텔에 왜 직원이 한 사람도 안 보이는 거야?'

물론 그 시간이 자정을 넘은 시간이라 야간 당직자도 몇 안될 거고 상황 확인하기에도 정신없겠지만.

한쪽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프런트 쪽만 보다가 옆을 돌아보았어.

어떤 덩치 큰 아빠가 맨발에 아이를 안고 재우는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더라.

또 다른 가족도 얼마나 다급했으면 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쳐나왔을까 싶었어.

그래도 우리는 다양한 모습의 동병상련인

투숙객들을 보니 긴장이 조금 풀리더라.

가끔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한 두 사람씩

내렸어.

조금 늦게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한 부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어. 그들보다 짐이 더 많았어.

우리는 속으로 '빵!' 터졌어.

두 개의 무거운 캐리어 외 그 많은 짐과 아이들까지. 이 와중에... 그들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화재경보에 자다가 뛰쳐나온 사람들

우리가 호텔 밖으로 나오니까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고 태풍이 올 것처럼 마파람이 세차게 불어왔어.

바로 밑에서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는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았으나 연기나 불꽃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어.

건물 안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인지 호텔 외부에도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은 자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차림으로 삼삼오오로 높은 화단석에 걸터앉거나 서 있더라.

안이든 밖이든 다들 그냥 그 상황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는 바람이 불고 추워서 도로 호텔 로비로 들어가서 문제 해결이 될 때까지 기다렸어.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져서 로비 라운지에서 파는 상품도 구경하고 포토존 에서 사진도 찍었어.


30여분이 지나자 호텔직원 한 사람이 프런트로 돌아오는 걸 봤어.

기다리던 가족들 중 동양계(중동 혹은 인도)인 듯한 중년의 남자가 직원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어.

호텔 29층-32층 사이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열린 문을 통해 연기가 복도 밖으로 빠져나와 화재경보센서가 작동하였다 고 애나가 통역을 해주었어.

그래서 29층부터 32층 사이의 투숙객들만 대피하게 했다 -가 그동안의 사건 경위였어.


그들의 대화를 멀찍이서 듣고 있는데

'참, 참, 이성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

프런트의 직원이 별일 없으니 다들 올라가라고 하는 거 같았어.

모두가 듣고는 이렇다 할 별 반응도 없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하였어.

물론 자신들의 언어로는 뭐라고들 하겠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서 컴플레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더라.

"우리나라 사람들 같았으면 밤잠도 못 자고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고?"

"직원들은 어디 가고 빨리 일을 처리 안 하냐?"라고 노발대발하며 고성이 오가고 불만이 터졌을 긴데.


한밤중의 화재경보 소동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조용히 마무리 되었어.

어느 누구도 큰 불만은 없는 듯 꿈을 꾼 듯한 얼굴로 잠자리로 돌아갔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처럼 누구에게도 트라우마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공포의 순간을 함께 견뎠던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 가끔 떠올릴 수 있는

웃기는 추억의 한 장면이 되기를.

맨발의 투숙객들과 다양한 피부색의 남녀노소들과 많은 짐의 그 가족들도.

'골드코스트 한밤중의 대소동'이라고.


무엇보다 화재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다행한 일이었어.

한밤중의 해프닝으로만 끝난 것에 대하여 모든 존재들에게 저절로 감사의 말이 나오게 된다.


또한 너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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