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추억 만들기
n야.
우리 그때 생각나지 않아?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시내에 살던 우리 동네 공터에 겨울이면 여성 국극단, 서커스단이 들어온 거 기억하니?
여성 국극단에서 하는 남장 여자의 '호동왕자 와 낙랑공주', 선화공주와 서동요' 등을 보았어. 또 그 당시로선 생소한 연극이 '패왕별희'라는 경극이었다는 것도 생각나고.
우리들은 어른들 틈에 끼어 스토리는 제대로 몰라도 함께 덩달아 웃고 울기도 했잖아.
남장 여자의 모습에 신기해하며 심취했고,
서커스단이 오면 또 거기에 매료되었어.
서커스단은 일단 스케일이 훨씬 더 컸고,
또 다른 상상력과 압도적인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
높은 천막의 천장 가까운 양쪽에 설치한 그네. 그 공중그네를 뛰는 곡예사들의 아슬아슬한 동작 하나하나에 관람객들은 가슴을 들었다 놨다 했어. 그물을 쳐놓긴 했지만 혹시라도 실수하여 떨어질까 봐 우리는 숨을 죽여 지켜보았고 손에는 땀을 쥐었지. 곡예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우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어.
동물들과 조련사들의 공연, 난쟁이 아줌마의 누워서 하는 통 돌리기 등 2시간이 넘는 공연은 보고 나면 뒷날에 또 보고 싶어졌어.
그러나 공연장 안으로 못 들어 간대도 밖에도 재밌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어.
공연장 입구에 적당한 높이의 칸막이(우리) 쳐놓은 곳에 코끼리, 말, 원숭이, 앵무새 등의 동물들이 있었어. 동물원에 가야만 볼 법한 동물들을 우리 집에서 50m 정도 거리에서 구경한다는 것은 대단한 볼거리로 재미가 쏠쏠했어. 광대와 난쟁이 아줌마 등의 곡예사들이 나와서 관객들을 유도하였어.
하루는 나무펜스에 딱 붙어 서서 동물들을 구경하던 나의 4살짜리 남동생을 바로 앞에 있던 덩치 큰 코끼리가 코로 말아 쑥 올렸다가 내려놓았어. 사람들이 "와, 하하하"하고 웃었고 내 어린 동생은 놀라서 어리둥절해했어. 또 웃긴 것은 남자애들이 천막 뒤쪽으로 기어 들어가다가 잡히기도 했다는 거.
ㅎㅎㅎ.
서커스를 보기 위해 연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어. 우리 동네는 그들이 떠날 때까지 사람들로 시껄벅적한 축제의 나날이었어. 광장옆에 살던 우리는 공연장에서 늦게까지 아련히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어. 서커스단에서 구슬픈 듯 흘러나오던 음악이 어렸던 내가 듣기에도 떠돌이 곡예사들의 삶의 애환이 느껴졌나 봐.
언젠지 모르겠지만 유명한 가수의 노래가 그때 그 시절의 서커스단에서 울려 나오던 전주곡과 비슷한 걸 듣고 깜짝 놀랐어. 장기 기억 속에 잠들었던 내 어린 시절 서커스의 추억이 바로 소환되었어.
성인이 되어 가보는 국내외 여행지마다 비슷한 서커스를 보았어. 새로운 기술의 무대장치, 아크로바틱 하고 위험천만한 묘기는 아슬아슬한 묘미를 느끼게 하였어.
태양의 서커스 'LUZIA' 브리즈번 공연을 기대하고 있었어. 4시 반에 시작하는
'LUCIA'를 보기 위해 우리는 잘 안 하던 화장을 하고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었어.
터번을 쓴 우버 기사의 차를 탔는데, 퇴근시간이라 차가 많이 밀리고 막히기 시작하였어.
서커스 공연장에 가까이 다달으니 복잡해서 들어갈 수 없다며 공연장 200m쯤 앞에 내려주고 달아나버렸어. "아이쿠! 많이 바쁜가 보네." 공터의 자갈길을 구두로 걸어가야 했지만 좋은 구경온 것을 위로 삼으며 이해하기로 했어.
날씨는 맑으나 구름과 바람이 불어 추위가 느껴져서 마스크 끼고 긴 스카프로 목과 어깨를 감쌌어.
어른, 아이, 남녀노소들이 축제를 즐기러 오는 것 같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거 있지. 여기서 느낀 것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대체로 자유로운 복장인데, 파티 갈 때는 확실하게 멋진 드레스코드를 한다는 거였어. 넓은 공터의 자갈길을 젊은 아가씨들이 하이힐을 신고 끈 나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는데, "아이고야! 안에는 추울 텐데 카디건이라도 가져오지."라는 말이 나왔어. 'LUZIA' 공연을 알리는 여러 배너를 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음식을 사 먹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은 최고의 나들이 같았어.
예약된 좌석에 앉았는데 앞에 있는 남자머리 때문에 시야가 가린다. 우리 좌석은 중앙 쪽 VIP석인데 잘 안보일까 걱정 었지만 곧 공연이 시작되었어. 화려함과 압도적인 무대 장치와 배우들의 아크로바틱 한 연기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연출되었어.
완벽한 연기를 위해 천 번, 만 번의 단련으로 사람들에게 불가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을 찍고 사진을 찍어도 라이트를 번쩍이지 않으면 크게 제재를 하지 않았어. 앞 좌석의 머리 때문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는데, 우리 옆좌석이 빈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한 칸씩 옆으로 옮기고 나서 여유를 갖고 보기 시작했어. ㅎㅎㅎ.
오페라나 뮤지컬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도 대단하지만, 서커스 단원들은 땅과 하늘을 날아다니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들이었어. "와,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상상과 동화의 세계로 데려가니 다들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어. 예나 지금이나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여전히 피터팬의 네버랜드 신드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인가 싶어.
중간 브레이크 타임에는 화장실도 다녀오고 음식도 사 먹었어.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아슬아슬하고 화려한 공연이 끝나자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어. 재미와 감동의 순간을 즐겼고 커튼콜도 보냈어.
50여 년 전의 서커스 공연은 어린 우리들을 판타지의 세계로 데려다주었지.
요즘의 서커스는 인간의 상상력을 과학과 디지털로 구현한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관람객들이 한꺼번에 빠져나오는데 우리는 천천히 공연장 로비에서 사진을 찍고 아트 상품을 구경하였어. 우버 검색을 하니 70불 이라네. "헉~"타고 올 때 40불이었는데.,..
점차 사람들이 빠지고 10분 정도 기다리니 60불에서 35불까지 내려갔어.ㅎㅎㅎ
예약을 하니 기사가 복잡해서 앞에 까지는 못 들어온다고 해서 구두를 신고 자갈길을 걸어 나갔어.
우버기사는 지금까지 탄 기사 중에서 제일 거칠게 운전을 하였어.
웁스! 우리가 탄 우버기사는 앞차와 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거야. 차량이 밀리는 큰 도로에 진입하면서 갑자기 브레이크를 크게 밟는 바람에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쏠렸어, 나는 벨트가 어깨에 쓸려 따가운 통증을 느꼈어. 아프다고 말하니까 기사는 앞차 잘못이라고 변명을 하네. 안전거리는 저가
안 해놓고. 내가 아프다고 하니 신경이 쓰였는지 손수건이 있냐고 묻더라. 손수건을 가운데 에어컨 바람 나오는 데 찬바람을 묻혀 어깨에 갖다 대라고 하는 거야. 바람 찬 손수건을 갖다 댔지만 살갗이 쓸려서 좀 아팠어. 한 번 더 물어보기에 저가 미안해할까 봐 조금 나아지고 있다고 했어.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해서는 몸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쌩 가버리네. 으이그,ㅎㅎㅎ.
집에 도착해서 얼음찜질과 약을 바르고 애나가 내려주는 시원한 자몽주스를 마시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어. 그래도 오늘 본 서커스 공연 본 소감을 이야기하니 기분이 좋아지고 다음에 또 봐야지 하는 아이 같은 마음이 생기네. 옛날의 서커스가 우리에겐 신세계였듯이, 오늘 서커스를 본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추억거리가 되겠지.
그 아이들이 40년, 50년 후에는 또 무엇을 보고 놀라고 있을까?
그때는 실제로 하늘 공연장에서 우리가 꿈꾸어보지도 못한 공연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는 것도 신나는 일이겠지.
n야.
변명을 하자면 나의 브리즈번 여행기는
너무 심심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거 같아.
그동안 우리들 삶에서 일어난 일상의 일들이 너무 슬프고 황당해서 즐거운 여행 이야기를 도저히 쓸 수가 없었어. 이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진 속의 즐거운 기억을 끄집어내 볼게. ㅎㅎㅎ.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