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때가 좋은 때였는데...
때 늦은 장마로 전국이 물난리로 힘든 때에 받은 소식은 조금 더 충격이었다.
세상 떠난 친구들의 이야기에 내 마음도 비에 젖어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J를 두고 주변에서 보살이라 불렀다.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로 남편은 뇌졸중에 의한 지적장애가 왔고,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J는 동생의 죽음, 아들의 병, 온전하지 못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고 너그러운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병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삶에는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그녀는 크게 허둥대는 법이 없는 백조처럼 품위 있는 사람이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썼다는 것을 주변에서는 알고 있었다.
다행히 자신의 병은 잘 치료되어 괜찮고 아들의 병도 의사의 오진으로 판명되어 한시름 나았다고 했다. 딸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고 연락이 와서 집안 행사로 작은 인사치레만 했다.
어느 날 J의 암이 재발되고 이름까지 바꾸고 종교도 바꾸었다고. 신의 은총을 받으며 요양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이 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에너지를 다 쓰고 갔을 거다.
우리가 미혼일 적에 좀 늦은 공부를 하던 동문이었고 나보다 4살 아래였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심성 못지않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갖고도 과시할 줄을 몰랐다. 시부모 모시고 농사짓는 사람과 결혼해서 소박하게 살고 싶어 했다. 그녀의 부모는 속상해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뜻대로 농사짓고 글을 쓰며 농민운동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층층시하 막내며느리로 살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시어른들 모시고 다복하게 삶을 가꾸는 그녀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한동안 남편의 사업도 승승장구했다.
화장도 하지 않고 수수한 차림의 개량 한복에도 그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한옥의 넓은 마루에 화사한 풀꽃 묶음을 멋스러운 병에 꽂아두고 집안의 곳곳에 자신의 감각을 무심한 듯 드러내는 사람이었지.
그때가 J의 화양연화였나 보다.
J야
너는 정말로 네 삶을 잘 살아왔어.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고,
누구의 원망도 사지 않고 그렇게 살아왔어.
햇볕이 좋아서
날씨가 흐려서
비 오고 눈이 내려서
글을 쓰면서
모든 순간이 다 좋다고 했어.
J야
잘 가라.
힘들고 아픈 날보다 좋은 순간만을 기억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으리라 헤아린다.
너의 부음은 서든임팩트 같다고 해야 할까.
우리가 풀지 못하고 마저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기에
아! 결국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구나.'
순간, 드는 생각이었다.
너를 더 이해하려 애쓰지 못한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우리가 마음으로 헤어지고 난 뒤에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잘 지내지?" "응."정도였고 어느 날부터는 이사를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지. 너의 소식은 거의 듣지 못하고 살았어.
몇 달 전에 너의 친구 M이 너를 길에서 마주쳤다는 말을 전해주었고, 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처음 본 너는 긴 머리에 눈웃음과 볼우물, 군화에 드레시한 옷차림은 너만의 개성이 돋보였지.
말을 예쁘게 해서 주변의 호감을 많이 받기도 하고. 우리는 같은 단지의 아파트에 살게 되어 더욱 친하게 지냈지. 우리가 한 시절에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미술관까지 다니기도 하고, 여행 중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고 허물없이 잘 지냈지.
큰돈을 거래하기 전까지는.
너는 친정 일로 늘 경제적으로 바쁜 사람이었어. 너의 장점 같은 단점은 속을 알듯 하면서도 모르겠다는 거였지. 잘 드러내지 않았고 늘 미소로 얼버무리는 사람이었어. 큰 일 앞에서도 너는 절대 서둘거나 당황해하거나 변명도, 미안해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저 때문에 흥분하는 나를 무슨 일이냐는 듯 차 한잔을 내어주고 진정시키는 그런 사람이었어. 그런 너 앞에서 네가 한 약속을 지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우리의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버린 너를 이해하려 애쓰며 잠 못 이룬 적도 많았어. 어쩌다 너의 소식을 들은 날엔, 내 마음은 이유 없이 요동쳤어.
네가 남긴 여파는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있지만, 나를 위해 해결되지 않는 소모적인 것에서 벗어나기로 애썼어. 너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어.
나의 이성적이지도 못한 오지랖 같은 측은지심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를 오랫동안 힘들게 만들었지. 이것은 나의 일방적인 이야기지. 너는 너대로 억울할 거라는 거.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며 헤어지지 못하고 제 갈 길을 갔지. 이후로 한 번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영영
이별이 되었네.
어느 드라마에선가 이런 대사가 있었어.
"죽어버리면 다냐!"라고.
내 마음이 바로 그 마음이야. 우리는 서로 말해야 했고 서운함을 토로했어야 했어.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지
말고 다 털어내야 했어. 묻고 잊어버리면 다냐고. 잊은 줄 알았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잖아.
하지만 이제는 떠나는 너.
너를 용서하고 나를 용서해 다오.
너의 아픔을 몰랐고, 서로의 소식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잊고 살았다는 것에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매듭을 미처 풀지 못하고 너는 떠나고 나는 남았네.
우리가 또 어느 생에서 만날 수 있을까.
과거 어느 생의 맺힌 매듭을 푸느라고 애쓰겠지.
그동안 너는 너보다 크고 무거운 짐을 져왔어.
모든 걸 내려놓고 부디 좋은 곳으로 잘 가라.
그대들 떠나는 날에 비는 순한 듯 촉촉하게 종일 내리고 있다.
마음을 아는 듯 슬프지는 않게, 많이 섭섭지는 않게, 남은 이들에게 작별인사 하듯이.
잘 가라, 벗들이여.
우리의 그 한 때는 참 좋은 시절이었어.
다음 생의 언젠가 마주 앉아 차 한 잔 할 수 있기를 슬픈 마음으로 기대하며.
향을 하나 피우고 떠나는 너희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 위 글은 늦은 장마에 쓴 글을 미루다가 이제야 올립니다.
무더위를 조금 가시게 비 오는 날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