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폰팅.
1896년 궁궐 안에 처음 설치된 전화기. 당시에는 전화기를 텔레폰(Telephone)의 한자식 발음인 ‘덕률풍’이나 ‘다리풍’ ‘전어통’,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전화기와 관련하여 1929년 1월 <별건곤>이라는 잡지에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폰팅에 관한 기사였다. 서로 다른 지방에 사는 남녀가 3년간 전화로 사랑을 속삭였다는 내용이었다. 부자도 귀족도 아닌 평범한 남녀가 당시에는 흔하지 않던, 그 비싼 전화로 폰팅을 한 것도 신기한데, 3년이나 지속했다니….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들의 연애 전말은 이랬다.
1929년 당시, 전화 사무는 우편국에서 이뤄졌는데, 우연히 경성-대전 간 우편 사무로 전화를 주고받은 두 청춘은 그만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 응당 그들은 매일 우편 사무를 빙자한 '공짜' 전화로 매일 사랑을 속삭이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그런데 으레 폰팅을 하다 보면 얼굴이 궁금하고 만나고 싶은 것이 상정된 일인데, 이 전대미문 연애 사건의 주인공들은 3년간 전화로만 사랑을 속삭였다. 한번 만나보지도 않고 전화로만 만났다니 참 독특한 연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끝인가?’
당연히 아니다.
'폰팅'이란 말도 없던 시대, 폰팅만 3년째인 두 남녀.
하늘도 이 답답생(당시의 유행하던 표현)들을 더는 두고 못 보겠던지, 기막힌 이벤트를 준비하게 된다.
어느 날, 남자는 휴가차 마산 온천에 놀러 가게 되는데, 거기서 말도 안 되는 천우신조로 그녀와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탕 속에서 목욕을 즐기던 남자는 스쳐 지나가는 어떤 한 목소리에 번개를 맞은 듯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정신을 차린 남자는 방금 지나간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임을 단박에 알아채고는 자석에 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남자는 선뜻 다가가 말을 걸 수 없었고, 멀리서 여자를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임을 직감할 수 있었고 재차 다가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행들이 서슬 퍼렇게 낯선 남자를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심하던 남자는 그녀가 묵는 여관에 찾아가 숙박부를 확인했고,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쾌재를 부른 남자는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녀와 독대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확인한 두 사람은 번개를 맞은 듯 급속하게 더 깊은 사랑에 빠져 버리게 된다. 결국, 기막힌 우연에 힘을 얻은 둘은 주말에 그 먼 서로의 지역까지 오가며 사랑을 속삭였다. 응당 두 연인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고,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사랑의 결실은 그렇게 아름답게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개탄스럽게도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말았다. 여자의 아버지는 둘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여리고 순수하던 연인에게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았던 것이다. 여자의 아버지는 '폰팅'이란 개념도 몰랐으며, 그 괴상한 신문물을 통해 싹튼 철부지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딸의 일탈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우편국에서 사직하게 한 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버렸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남자는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에 빠졌지만 결국,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호통재라. 대한제국 최초의 폰팅은 그렇게 몹시도 서글픈 결말을 맺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지인이 “에이, 어차피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생각에는 이들은 충분한 인연이 있었다. 우연히 우편국 사무로 통화하게 됐고, 무슨 이유에서든 그 뒤로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전화기를 붙들고,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인연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애정행각은 전대미문의 우리나라 최초의 ‘폰팅’이 아니었던가? 그도 모자라 마산 온천에서 우연히 만났다지 않은가? 이 정도가 인연이 아니라면 그 어떤 기막힌 사건을 동반해야만 인연이란 말인가?
그들에겐 ‘인연’이 없던 것이 아니라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용기가 부족했기에 자유연애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아버지와 ‘폰팅’을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던 당시 사회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했다. 남자는 흔들리는 여자를 설득하고, 그도 부족하면 손을 잡고 도망쳤어야 했다. 하지만 남자 또는 그 여자는 그러지 못했다.
문득 ‘용기’가 부족해 사랑하던 여인들을 떠나보내 놓고는 ‘인연’이 아니었다고 치부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글을 쓰겠다고 연 400만 원 수준의 말도 안 되는 수입으로 근 7~8년을 버틴 나에게 사랑은 질곡이었다. 그 과정에서 회사도 취직하고 정기적인 수입을 벌었지만, 어느새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같은 자리에 돌아오곤 했다. 응당 ‘나 같은 놈이 누구를 책임질 수 있겠냐?’라며 스스로 자책하고 항상 그녀들로부터 도망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그녀들은 내가 당당하게 부모님 앞에 나서고 말만이라도, 비록 그것이 허장성세일지라도 자신들에게 일말의 확신을 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일찍 성공한 작가가 되거나 남들처럼 돈을 꼬박꼬박 벌어오는 회사원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고집스럽게 글을 쓰겠다고 결심할 용 기는 냈지만 그녀들을 위해서는 그 어떤 용기도 내지 못했던 나였다.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나의 불용(不勇)에 기인한 언행에 그녀들은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내가 떠나보낸 것인지 그녀들이 나를 떠난 것인지 모르게 떠나 버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한 이유는 ‘이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가 나로 인해 아픈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까닭도 있었다. 차라리 도망친다는 오해를 받을지라도 그러는 편이 그녀들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상기한 ‘다리퐁 러브’의 남자도, 어쩌면 덜 사랑했거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한 그녀를 위한 결단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폰팅’ 사연을 접하자마자, 남자와 나에게서 그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그 결과로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써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리풍 러브’라는 드라마 단막극으로 쓰고 있다.
물론 해피엔딩이다. 작품 안에서만이라도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이어주고 싶었다. 부디 ‘다리풍 러브’가 방영돼 비록 이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우리나라 최초 폰팅’ 커플의 못다 이룬 사랑에 대해 작은 위안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불어 그녀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도망치기보다 ‘용기’로 사랑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작품에서 말하고 싶다. 나의 사랑을 돌이켜보자니, 회한으로 그녀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만 가득할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