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가 바람피운 것이 분명했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마음까지 잃는다.

by 이우진

예전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의심스러운 통화를 마친 어느 날. 나는 통화를 끊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자 친구의 회사 앞에 잠복하기 위해서였다. 회사 앞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 준비란 나 외에 제3의 남성과의 조우, 결투, 경찰서, 이별 등등.

잘보면, 뭔가? 이상하다. 2026 고양시 한 아파트촌에 현존.

지루한 기다림 후, 드디어 여자 친구가 사무실을 나왔다. 나는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조용히 따라붙었다. 나도 내가 너무나 치졸하단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루한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내가 건진 것이라고는 여자 친구가 아주 나쁜 여자였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 나쁨이란 전철 안 승객들 모두가 앉지 않고 비워둔 노약자석에 떡하니 앉더니, 발가락에 힐을 걸고 까닥까닥거리는 여자였다는 사실. 결론적으로 말해 도덕적으로 약간의 흠결이 있었지만, 꽤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마저 드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도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지고지순의 일부종사형 여인이었다.


모두가 나의 기우(杞憂)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비단 나만 그런가? 우리는 모두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한번 실험을 해 볼 것을 권한다. 다이어리에 지금의 고민을 적어 보자.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 읽어 보기를 권한다. 90% 이상의 문장에서 ‘내가 이 고민을 왜 했지?’ 하고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법정 스님의 말씀으로 기억된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마음까지 잃어버린다.” 이 말은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고민을 한다고 돌아오지도 않을 텐데 계속 잃어버린 지갑을 고민해서, 결국 마음까지 잃어버리는 우매함을 경계하자는 말씀이시다.


잃어버린 것에, 혹은 광의로 떠나버린 것에 대한 고민은 접자. 그다음 남는 고민은 상기한 기우가 있을 것이다. 기우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기나라 사람처럼 황당한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고민인데, 그 모두를 기우라 치부할 수 없다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여인이 정말 제삼자를 만날 가능성 같은 것 말이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런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고민을 한다는 것은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만 저 앞에 가서 미리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이런저런 부침을 겪고 다시 몸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몸이 시간을 따라, 예전 정신이 저 앞,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이런저런 부침을 겪은 자리에 마침내 당도하게 됐다고 치자.

단언하지만 정신이 예상한 일들은 달리 벌어지거나 거의 일어나지 않고, 응당 준비해 뒀던 대처방안들은 부지기수가 쓸모없게 된다는 데 내 손을 걸 수 있다. 만약에 벌어진다고 쳐서 대처방안들이 어느 정도 쓸모 있는 경우가 있다고 치자. 물론 이런 예외는 인정하겠다.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도 대다수 고민한다고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가령 내 여자친구의 사례에 대입해, 제삼자를 만나는 여인을 어떻게 해서 달라질 것이 본질적으로 있겠는가 말이다? 없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이걸 전문용어로 '어차피 나가리'라 말한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러면 그냥 현재에 충실하자. 이 말이 잘 안 믿어진다면 상기했듯이 노트를 꺼내 고민을 있는 대로 다 적어 둬라. 그리고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뒤 한번 다시 꺼내 보길 바란다. 나는 여러 번 해볼 것도 없이 세상에는 고민을 해야 할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나는 오늘도 고민을 달고 산다. 그럴 때마다 노트를 꺼내 적는다. 오래 하다 보면 굳이 노트를 꺼내지 않아도 저 멀리 앞으로 가 고민하고 싶어 하는 내 정신을 온전히 내 머릿속 지금 이 자리에 쉽게 잡아둘 수 있다. 이놈을 어떻게 현재의 자리에 잘 묶어 두는가가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 느끼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지도 못하면서...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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