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결혼 메커니즘에 대한 소고.
얼마 전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익히 아시는 결혼식장 풍경.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정장 예복을 입은 신랑과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주례선생과 하객들. 길어야 2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다음 예식을 위해 빨리 자리를 비워 줘야 하는 한국식 결혼 메커니즘의 향연.
주말마다 전국의 예식장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다. 나는 왠지 이 한국식 결혼에 이물감을 갖는다. 우리 민족이 예부터 해오던 전통도 아니요, 문화의 변화에 따른 시대적 요구도 아니다. 오직 실용주의와 효용에 따른, 일을 치러 내기에 급급한 척박한 의식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이혼율이 40%를 넘기는 세태에서 이런 식의 형식적 예식이 무슨 가치가 있을지 심히 의문이 간다. 근자에 나와 같은 이들이 늘어나는지 전통혼례, 하우스 웨딩, 무주례 웨딩 등 한국식 결혼에 대한 다른 시도와 접근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서태지 같은 인물은 쑥스럽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결혼식 없이 잘살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이런 상기한 이물감들 때문에 나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매우 꺼리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장례식이다. 장례식이라면 인간관계가 멀고 가깝고를 떠나 시간만 허락한다면 꼭, 참석하는 편이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 장례식장도 곧잘 간다. 장례식장은 예식장만큼 이물감이 없다. 예전의 울고,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름까지 마다하지 않던 ‘축제’의 의미는 많이 사라졌어도, 본질에서는 어느 정도 전통이 남아있다는 생각에서 편하다. 그렇게 참석한 장례식에서 얼마나 많은 조문객이 방문했는 지를 통해 그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속세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그저 영정사진을 뵙고 “고생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속으로 말하며 진심으로 명복을 빌 뿐이다.
사람의 눈물은 99%가 자신을 중심에 둔 눈물이라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예를 들자면 “나를 두고 떠나면, 이제 나는 어쩌나?”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슬프지 않을 수 없다.” 등 대부분이 나를 중심에 두고 떠난 자의 슬픔을 말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위한 눈물이, 아닌 타자를 위한 1%의 눈물이 있다. 이 눈물은 철저하게 대상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다. 이 눈물에는 나의 자리가 없다. 오직 대상 자체에 대한 슬픔과 연민 그리고 공감만이 존재한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보며 1%의 눈물을 생각한다.
그러고는 일상으로 돌아와 1%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는 숭고한 눈물의 진위를 따지는 일, 자체에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의 눈물에 관한 논의는 중요하다. 우리는 타고나길 99%의 눈물을 흘리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세상에 없다. 내가 나르시시즘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병폐의 근원이 나르시시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은 종종 이기심, 체면과 과시, 집단 이기주의 등등 우리 사회를 좀먹는 인습과 병폐의 맹아가 되기 일쑤다.
많은 사람들이 1%의 눈물을 흘리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사바나처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이 사회에서 당장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니 오롯이 추모를 위해 참석한 장례식장에서만이라도 1%의 눈물이 시작되길 바란다.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픈, 마음에 글을 시작한 나는 1%의 눈물을 흘리는 99%가 사는 세상이 온다면, 더 이상 좋아하는 글을 쓸 이유가 없어진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런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