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식민의 기억, 다른 건축의 흔적 – 한국·일본·중국 도시 비교기
건축은 기억을 품은 공간이다
중국과 일본을 자주 여행하다 보면 자주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유난히 유럽풍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그런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양국의 도시에도 근대 건축의 흔적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밀도와 보존 방식, 도시 풍경 속에서의 위상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 단순한 의문이 하나의 질문이 되었고, 질문은 결국 하나의 글이 되었습니다.
도시의 얼굴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건축입니다. 건축은 시대의 언어이며, 권력과 문화, 정체성과 기억이 응축된 물리적 흔적입니다. 특히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흔적은 건축이라는 형태를 통해 고스란히 남거나, 반대로 조용히 지워지기도 합니다.
같은 시간을 지나온 동아시아 세 나라, 한국·일본·중국은 식민지 또는 제국주의 시기를 겪었지만, 그 시대의 건축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웠고, 누군가는 남겼으며, 누군가는 그것을 품어 재해석했습니다. 단지 오래된 건물의 보존 문제를 넘어, 우리가 과거를 어떤 시선으로 마주해 왔는지를 건축은 보여줍니다.
이 글은 한국과 일본, 중국의 도시를 이루는 건축의 결을 따라가며, 각각의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식민의 흔적'을 기억하거나, 혹은 잊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 잊히거나 지워진 건축의 기억
우리나라에서 식민지 시절의 유럽풍 건축물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예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떠올리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건물조차도 이제는 철거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렇듯 식민 지배의 중심이었던 서울 한복판조차 일제강점기의 흔적은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왜일까요? 이는 단순히 세월이 흘러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와 도시가 성장해 온 방향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남겨진 건축물들은 대부분 일본식 근대건축 양식이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양식을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절충형 스타일로 발전시켰고, 조선총독부, 경성역(현 서울역) 등의 관공서와 은행, 학교 건물은 바로 그 절충 양식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이 시기의 건축은 유럽풍이라기보다는 일본식 모더니즘이었죠.
광복 이후 한국 사회는 '식민 잔재 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건축물들을 적극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그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또, 1960~8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 개발은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보존보다는 공간 효율성과 경제적 가치에 집중했기 때문에, 수많은 건축 유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서울의 도심이 고층 빌딩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근대 건축물들은 역사보다 부동산 가치 앞에 밀려난 것이죠.
한국은 한 번도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하이 와이탄처럼 직접적으로 유럽풍 건축이 세워질 기회도 없었습니다. 결국 지금의 도시는, 전쟁과 개발, 청산의 논리 속에서 ‘의도된 공백’을 품고 성장해 왔습니다. 남아 있는 몇몇 건물들 구 러시아 공사관, 정동제일교회, 인천의 제물포구락부 등은 마치 박물관 속 유물처럼, 조심스럽게 과거를 증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본: 전쟁과 자연이 삼켜버린 기억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메이지 시대 혹은 제국주의 시기의 웅장한 건물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처럼 도시적 스케일이 크고 전통과 근대가 공존할 법한 곳조차, 현대식 빌딩 사이사이에 간신히 몇 채가 남아 있을 뿐이죠. 이유는 명확합니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주체였으며, 그 흔적은 전쟁과 자연재해, 그리고 전후 도시화 속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의 B-29 전략폭격기들이 감행한 도시 폭격이었습니다. 1945년 도쿄 대공습 하루 만에 10만 명이 사망했고, 도시 대부분이 불타 사라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923년 관동대지진은 이미 많은 근대 건축을 무너뜨렸습니다. 일본의 근대 건축은 대부분 목조, 벽돌 구조였고 내진 설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자연과 전쟁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미군정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 일본은 군국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 국가로의 이미지 전환을 강하게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를 상기시키는 건축물, 특히 군사적·제국주의적 상징성을 가진 것들은 철거되거나 용도 변경되며 점차 사라졌습니다. 국가 차원의 '망각의 건축'이 시작된 셈이죠.
또 하나 중요한 배경은 고도경제성장기입니다. 1950~70년대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업화에 성공하며, 대도시는 급격히 재개발되었습니다. 오래된 건축물은 효율성, 공간 활용성, 현대성 앞에 철저히 밀려났습니다. 과거를 보존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지어 올리는 것이 미덕이 된 시대였던 겁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제국주의의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의 건축적 흔적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건물은 도쿄역, 니혼은행 본점, 구 제국호텔 일부 등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현대화와 리모델링을 거치며, 과거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진 않습니다.
중국: 굴욕을 자산으로 바꾼 도시들
중국의 도시, 특히 상하이, 칭다오, 하얼빈, 대련, 톈진 같은 곳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을 느껴본 적 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도시는 실제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양 열강에 의해 나뉘어 조계지(租界)로 운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이 이 땅에 들어와 자신들의 도시계획에 따라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상하이의 와이탄(外滩)을 따라 걸으면, 고딕, 바로크, 신고전주의, 아르데코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이어집니다. 프랑스 조계는 지금도 고급 주거지와 부티크가 어우러진 거리로, 칭다오의 독일풍 교회와 관청은 여전히 시의 상징이자 관광명소로 기능합니다. 하얼빈의 소피아 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의 상징으로, 하얼빈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유럽풍 건축물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몇몇 도시는 중일 전쟁, 국공내전의 직접적인 피해를 덜 입었고, 근대 건축물은 이후에도 행정기관, 박물관, 문화시설로 활용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이러한 건축물들을 ‘굴욕의 역사’로만 인식하지 않고, ‘세계 속 중국의 기억’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중국은 과거의 조계지를 단순한 치욕의 공간이 아닌, 세계와 교류하던 흔적이자 문화적 자산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는 도시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제적인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상하이나 대련의 유럽풍 거리들은 도시 브랜드로 작동하며, 외국인 투자자나 관광객에게도 매력적인 요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중국이 그 건축의 흔적을 통해 오히려 도시의 품격과 역사를 강화시킨 반면, 제국주의 주체였던 일본은 그 흔적을 지웠고,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은 그 기억을 도중에 잘라낸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건축은 기억의 지도다
건축은 그 자체로 기억의 공간이며, 시대의 선택을 말해줍니다. 한국은 과거를 지우며 새로운 미래를 지으려 했고, 일본은 전쟁과 경제 성장 속에 과거를 잠재웠습니다. 반면 중국은 상처 위에 의미를 덧입히며 과거를 현재로 끌어안았습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사는 도시의 풍경이 단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와 기억의 결과임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남은 건축물과 사라진 공간들, 그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