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그의 집안은 참 가난했었나 보다. 먹을 게 없어 밥을 굶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60년대 태어났다면 그럭저럭 밥 굶을 정도는 아닐 텐데도 그는 남다른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의 어려움이 디딤돌이 될지 걸림돌이 될지는 본인의 하기 나름이라는데 그는 그 아픔을 디딤돌로 삼아 훌륭히 일어섰다. 그와의 만남은 2004년이었다. 당시 지역농협별로 위촉된 설계사를 관리할 계약직 직원을 모집하는데 그가 채용된 것이다. 처음 그의 첫 사무소는 창문도 없는 지역농협의 옥상 창고를 개조해 출발을 했지만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열정은 소속 설계사들의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났고 머지않아 좀 더 나은 공간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듬해 나는 사업단장으로 부임을 했고 진주에 있던 그는 내 조직 아래로 들어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그가 자신의 지점을 낼 때였다. 우리는 해를 넘기기 전에 지점을 만들기로 하고는 3개월 안에 기준을 채우기 위해 설계사들을 집중 모집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도왔던지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고 그는 위탁받은 사람들이 아닌 자신의 사람들로 지점을 낼 수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사업단장이면 그는 지점장으로, 내가 부장이면 그는 사업단장으로 우리는 회사 내 경력을 이어갔다. 그는 어떤 어려운 지점을 맡더라도 6개월 안에 정상화를 만들어 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만큼 목표 달성에 대한 집요함이 남달랐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사업단장 시절 아래 직원들의 다면평가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게 되었고 결국 좌천되어 다시 지점장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나러 대구로 내려갔다.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하는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일을 하는 것은 네가 할 수 있지만, 남이 너를 평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우리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 그는 내 말을 수용하고는 그렇게 조용히 일 년을 보냈다.
2020년 말 인사철이 되자 그는 본사로 오고 싶다고 했다. 50대의 나이에 승진한 것도 아니고 실무 일을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래도 자신의 현 상항에 대한 전환점이 필요할 것 같다기에 약간 무리수를 두어 내가 근무하는 부서로 전입시켰다. 그리고 다시 일 년, 그는 몸 고생 마음고생을 참 많이 했다. 그간 현장에만 있다 보니 문서 기안이나 타 부서와의 협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고 어린 직원들의 눈총을 꽤나 받았다. 전후 사정은 알고 있지만 내가 개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가끔씩 불러 위로해 주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는 나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그리고 올해 인사철, 그는 자신이 잘 아는 영업분야를 다시 지망했고 나는 그의 전출 내신을 수용했다.
어제 서울 생활을 정리하는 그와 조촐한 둘만의 이별식을 가졌다. 소주가 꽤나 돌았다. 이제 그와 나를 20년 가까이 이어준 직장 내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젊은 날 우리가 열정을 불태웠던 시간들은 서로에게 깊이 남을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부산으로 가는 그를 서울역 플랫폼까지 배웅을 했다. 열차 안으로 들어갔던 그가 다시 나오더니 나를 깊게 포옹했다. 이래저래 이별은 참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