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 키르기스스탄 기록 3

by 장용범

이번 키르기스스탄 여행은 개인적으로 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지난 5월 초, 유라시아 평론 이사장이신 김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오시는 귀한 손님들이 계신데 대전 카이스트의 캠퍼스 투어를 동행해 줄 수 있겠냐고 하셨다. 다른 일정들을 보니 오후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알고 보니 이 나라의 대통령 형님네 가족인데 어머니와 두 아들들이었다. 자녀들의 한국 유학을 사전에 알아보고자 캠퍼스 투어를 원했던 것이다. 첫날 환영의 저녁 식사도 했던 터라 구면이었다. 당시 통역과 기사까지 딸린 일행이었지만 그들 역시 한국 사정에는 그리 밝지 않은 편이었다. 아무튼 당시 그분들과 동행하며 카이스트 캠퍼스 투어와 관련 자료 등을 찾아 제공했고 마지막에 그쪽 어머님께서는 깊은 감사의 말씀과 함께 키르기스스탄에 꼭 한 번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로부터 얼마 후 김 교수님 주관으로 실제로 키르기스스탄 여행단이 꾸려졌고 여름휴가를 겸해 신청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그분들이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회 엘리트 계층임을 알게 되었다. 도착 첫날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성대한 만찬이 있었는데 어제는 그들의 별장으로 초대를 받아 식사와 친교의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의 여행 일정을 함께하며 도와주는 별도의 사람까지 배치된 걸 보면 대략 이 상황이 어떠하다는 걸 알 것 같다. 게다가 입국 이튿날은 주 키르기스스탄 한국 대사와 영사까지 찾아오셔서 식사까지 함께 했으니 우리가 마치 한국의 공식적인 외교사절단 같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이곳 키르기스스탄은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70-80년대와 비슷하다. 평지인 인근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즈흐스탄과는 달리 톈산산맥의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고 석유 같은 자원이 없어 그리 잘 사는 형편은 아니다. 농업과 목축업이 주요 산업이지만 그것도 면적이 넓지 않아 많은 국민들은 외국으로 일하러 떠났고 그들의 송금이 이 나라 경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한국의 지난시절과 비슷했다. 우리 일행의 여행 안전과 편의를 위해 동행하고 있는 아르겐 이라는 청년은 이곳의 사복경찰인 것 같은데 애국심이 상당한 청년이다. 건배 제의를 하라고 했더니 ‘우리도 언젠가는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해 가슴 한편이 찡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곳 자연 풍광을 둘러보며 느끼는 마음은 그들의 잘 산다는 게 이런 자연을 헤치는 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알프스를 수차례 다녀왔다는 한 분은 이곳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우리도 호수의 보전을 위해 두 번 오지는 말자고 했다. 이래저래 인간은 지구에 크고 작은 민폐를 끼치는 존재들인가 보다.


어제 초대받아 카라콜이라는 도심 근교의 유르트 별장에 당도한 우리 일행은 차려진 음식 규모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도 호스트인 분이 일가족까지 동원하여 어제저녁부터 음식 준비를 했다는 말에 여인분들에게 황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우리도 70-80년대 집안이나 동네잔치에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옛말이 되고 말았다. 함께 간 여성들은 이곳은 여자들이 살 곳이 못된다는 말도 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정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모두가 끝날 것 같지만 문제는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이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인간이 잘 산다는 것은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는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기념촬영
별장 만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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