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인터넷이 안 터지는 손쿨 산정호수에 다녀왔습니다. 여행기록이지만 시간대로 나열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생각난 바를 올려 보겠습니다. ^^
이곳은 키르기스스탄의 3,000미터 고지에 있는 손쿨호수. 수도 비슈케크에서 거의 10시간 정도 산으로 산으로 온 것 같다. 해발고지가 높은 만큼 나의 고산 증상은 여지없이 나타났다. 머리가 아프고 호흡은 힘겨워진다. 다른 사람들보다 고산 증상에 민감한 편이라 어제저녁에는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고산에서의 술 마신 다음날이 얼마나 힘든지 지난 중국 샹그릴라와 설산 여행 경험으로 잘 알고 있어서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휴대폰의 안테나도 사라진 이곳에서 이틀을 보내게 되었다. 길은 험난했지만 외길 비포장 도로를 따라 이곳으로 오는 여정은 구비구비 비경이었다. 톈산산맥의 눈이 녹아내린 물과 푸른 초원, 들꽃 그리고 그 속에서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은 야생과 가축의 중간 어디쯤인 것 같았다. 저녁 9시가 되도록 해가 지지 않는 백야현상을 경험하며 호수를 찾아가는 도중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다. 숙소까지는 아직 멀었는데 비포장 외길을 오직 자동차의 라이트 불빛 하나에만 의존하여 가다 보니 묘한 긴장감마저 일었다. 밤 10시를 넘겨 도착한 유르트 여행 숙소, 직원들은 우리의 방문을 차와 와인, 작은 간식거리를 준비해 맞아 준다. 그중 한 소녀는 서양계의 보이시한 얼굴인데 머리 염색이 특이해 게임의 캐릭터 마냥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늦은 저녁식사가 열리고 일행들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호숫가 첫날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 창밖의 햇살에 눈을 떴다. 어제는 밤이라 몰랐지만 유르트 출입문은 투명으로 되어 있어 누워서도 초원과 호수의 전경이 바로 보였다.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빛이라는 마술이 부려지는 순간 세상은 내가 일찍이 경험 못했던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동녘에서 뜨는 햇살에 반짝이는 초원과 그 위에 풀을 뜨는 말들, 그리고 쪽빛 색의 호수 전경을 보며 컴퓨터 윈도우 바탕화면을 떠올리는 내가 우스웠다. 이렇듯 문명에 적응되어 온 삶은 쉽게 벗어나질 못하는 법이다. 나의 부족한 글로 그 광경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사진으로 남기긴 했지만 그것으로 그 향긋한 풀내음, 바람소리와 가감 없는 하늘빛을 전하기도 역시 한계가 있어 이쯤에서 절제하기로 한다. 그냥 직접 한 번 와서 경험해 보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호숫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여행 오기 전 누리호의 발사 성공 소식을 접했는데 대자연 앞에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일까도 싶었다. 뉴턴은 자신의 과학적 업적을 큰 바닷가에서 조약돌 가지고 노는 아이에 비유한 바 있는데 그것을 떠올려 작은 돌 하나를 집어 호수에 던졌다. 퐁!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나란 존재도 참 작은 존재려니 싶다. 등고자비, 높이 올라가면 겸손하라는 것보다는 ‘높은 곳에 오르면 자신의 작음을 알게 된다’는 해석이 좋다.
식사시간, 약간의 고역이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서다. 그럴듯하게 준비된 식탁이 차려졌지만 자꾸 익숙한 빵과 치즈, 잼 정도에만 손이 간다. 웬만해선 잘 먹는 편이지만 고산증세가 겹치니 입맛이 없는 탓이다. 많은 이들이 낯선 여행을 그리워하지만 정작 적응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어제 출발 전 도시 호텔의 다양한 아침 메뉴 중에 한국의 컵라면이 있는 것을 보고 입맛만큼 바꾸기 힘든 습성이 있을까 싶었다. 얼큰한 김치찌개가 그리워지는 초원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