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 북촌의 헌책방에서

by 장용범

살다 보면 가끔 뜬금없다는 느낌이 드는 곳을 만날 때가 있다. ‘북촌책방’을 본 것도 그랬다. 이건 발견했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북촌 골목 구석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헌책방이었다. 안국역에서 내려 정독 도서관으로 가는 길인데 늘 가던 길과는 달리 헌법재판소를 지나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골목 구석에 “어, 이런 곳에 책방이? 그것도 헌책방이 있네.” 나도 모르게 발이 한옥 대문으로 향했다. 입구가 너무 예뻐 사진 한 컷을 찍으니 밝은 미소로 주인 할머니가 들어오라고 하신다. 한옥 마당에는 헌책이 진열되어 있고 방마다 책이 가득이다. 책꽂이에 꽂아둔 것도 있지만 그냥 쌓아둔 책들도 많다. 마치 보물을 숨겨두었으니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 같다. “시원한 방에서 천천히 둘러보세요”라기에 “들어가도 되나요?”라며 누가 들어도 답이 뻔한 말을 했다. 이런 책방 분위기는 처음이라 마치 남의 집 안방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다. 아, 예전에 한 곳 보긴 했다. 충북 괴산의 ‘숲 속 작은 책방’이라는 게스트 하우스 겸 책방에서 하루 묶었을 때이다. 낡은 서가를 둘러보다 호기심에 끌려 주인장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어떻게 여기다 헌책방을 열 생각을 하셨어요?

*주인: (웃으며) 그냥 은퇴 후 품고 있던 오랜 꿈이었어요.

*나: 은퇴 후 이렇게 꿈을 이루신 분을 보니 참 부럽네요. 그래도 책방을 열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으셨을 텐데요.

*주인: 그랬죠. 그런데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품고 있다 보니 그런 기회가 오더라구요. 은퇴 후 주변에다 입버릇처럼 내가 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지인이 이런 게 나왔더라고 알려줬고 뜻이 맞는 네 사람이 함께 해보자고 해서 시작한 거죠.

*나: 저도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은퇴 선배님이시니 은퇴 후 꿈을 이루는 노하우 같은 것 하나 들려주시죠.

*주인: (의외라는 듯) 그러셔요? 그리 안 보이는데. 은퇴를 하고 나면 주변에서 참 많은 이야기들과 유혹들이 오더군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내가 뭘 하고 싶어 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를 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고 봐요. 제 주위에는 은퇴 후에도 현역 때처럼 이것저것 다 가지려 하다 오히려 크게 손해 본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적어도 북촌의 작은 한옥에 헌책방을 열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겠죠.(웃음)


대강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주인장과의 대화를 마치며 매월 열린다는 독서모임에서 다시 뵙기로 하고 ‘북촌책방’을 나왔다. 은퇴 후 꿈을 이루는 법을 알려주며 ‘하고 싶은 것과 그것을 위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정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나에게 전해주는 핵심 메시지 같다.


*은퇴를 앞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 글 쓰고, 책 읽고, 돌아다니기(특히 유라시아 지역중심으로), 배움을 매개로 인연 짓기(동아리, 강의, 세미나 등)

*그것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오직 돈벌이를 위해 은퇴 후에도 하는 일, 편안하고 안락한 일상, 더 좋은 자동차, 더 넓고 좋은 아파트, 나의 꿈을 위해 쓰는 작은 지출(이건 포기가 아니라 투자일지도 모르지만 여행경비나 배움을 위한 지출 등), 글을 쓰며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별로 유명해질 것 같지 않으니 처음부터 내려두자)


그런데 대강 이렇게 정해두니 여행경비를 제외하면 그렇게 큰 비용이 들 것 같지도 않다. 글은 블로그와 브런치에 계속 쓸 것이고, 책은 POD로 출판하면 거의 무료로 낼 수 있을 것이다. 배움의 기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널려있다. 특히 서울은 도서관, 문화센터 등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학습기회가 아주 훌륭하다. 그리고 학습의 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배움을 매개로 한 교류는 자연스레 이어질 테니 이보다 경제적인 은퇴계획이 있을까 싶다. 여기서 조금 더 욕심내자면 중앙아시아 같은 데서 가르치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게 이번 키르기스스탄 여행을 통해 가진 생각이다. 모처럼의 여유로운 주말, 뜻밖의 곳에서 만난 한 인연에게서 은퇴생활의 신박한 꿀팁을 하나 전수받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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