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에 불안해하는 후배를 만난 후 지금의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은퇴한 지 3년, 사실 2년간의 계약직 업무를 수행한 덕에 실질적인 은퇴는 올해 2월부터였다. 지금 나는 어떤 마음일까? 그나마 불안보다는 자유와 해방감을 더 느끼는 것 같다. 영원히 나를 품을 것 같았던 회사라는 곳도 실상은 내가 20대 때 우연으로 맺어진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였다.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매달 주는 월급의 달콤함에 그리 오래 몸담았던 것이다. 감사한 일이지만 달리 보면 돈이라는 조건에 나의 시간과 몸의 자유를 저당 잡힌 생활이었다.
'그냥 산다'는 말이 참 좋아 보인다. 요즘 나에게도 그런 느낌이 든다. 종교의 수행자들은 자발적인 '그냥 산다'를 실천하지만 나는 은퇴와 함께 자연스레 '그냥 산다'를 따르게 되었다. 어찌 살고 있기에 '그냥 산다'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스트레스받는 계획들이 없다
계획 자체가 없지는 않으나 목표 얼마, 언제까지 진도 몇 % 달성 등 생각만 해도 가슴 답답한 계획들은 아니다. 그냥 평소 관심 가던 미술사 강의도 들으러 가고, 매일 루틴에 따른 글쓰기나 산책도 즐기고, 몇몇 독서 모임이나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한다. 계획은 있지만 가급적 따른다는 것이지 꼭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은 없다.
자연스레 돈벌이에 대한 미련을 접다
내년이면 환갑이다. 노인도 아니고 장년도 아닌 어정쩡한 나이다. 좋은 일자리가 주어질 나이도 아니고 사업을 시작할 용기는 더 없다. 자연스레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는 마음을 내려두었다. 미래가 불안하지 않으냐고 하겠지만 '그냥 산다'는 원칙에 따라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오늘을 보내기보다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온전히 누리기로 했다. 돈은 속성상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법이다. 나 스스로 선을 그어 이만하면 되었다로 정했다. 100억을 가진 사람도 하루를 살고, 100만 원이 없는 사람도 하루를 사는 게 세상이다.
시간의 자유를 누린다
외출할 땐 출근 시간을 피한다. 점심 약속은 직장인들과 겹치는 시간을 피한다. 외출했다 집으로 오는 시간은 네댓 시로 하여 퇴근 시간의 혼잡함을 벗어난다. 주중의 낮에 쇼핑을 가거나 영화관을 간다. 이 모든 게 시간의 자유를 만끽하는 방법이다. 그러다 가끔 부모님 뵈러 주중에 부산을 간다.
배움의 자유를 누린다
어제는 토요일, 삼청동에서 중국 청대의 산수화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강사가 준비한 다양한 청대의 그림을 감상하며 그림의 특징이나 시대적 배경 등을 듣는 시간을 가져본다. 장차 내 책을 스스로 디자인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인디자인 강의를 듣는다. 이 시대의 화두인 인공지능을 다루는 다양한 방법들을 접하기도 하고, 매월 독서모임도 진행한다. 자발적인 배움의 시간은 자유를 누리는 시간들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
이제 급할 게 없다. 불이 바뀌는 횡단보도에서는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가급적 뛰지 않기로 한다. 가끔 안 되는 것도 있다. 밥 먹는 걸 좀 천천히 해야 하는데 늘 급히 먹고는 아내에게 핀잔을 받는다.
은퇴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남에게 베풀며 그냥 살아라'가 그나마 답에 가까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