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생신을 맞아 부산에 머무는 동안 직장 후배를 만났다. 올해를 끝으로 은퇴를 할 후배는 은퇴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3개월 남짓 남은 기간인데 사업체를 차리는 것도 어렵고 그렇다고 늦은 나이에 취업도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내가 은퇴 후 2년 동안 수행했던 순회검사역이라는 일도 지금은 은퇴자들끼리 경쟁이 심해 꼭 된다는 보장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간 여러 상황들이 달라졌나 보다.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지난 2년 동안 배려해 준 회사에 감사함이 크다. 달리 조언할 말은 없고 은퇴 전에 하는 은퇴 후 고민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사실이다. 제아무리 고민해 본들 몸이 회사에 있는데 아직 다가오지 않은 회사 밖에서의 미래를 어찌 알겠는가. 차라리 그 시간에 남은 직장 생활이나 잘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동호회나 취미거리를 찾아보는 게 실속 있을 것이다. 미래의 일을 떠올리면 희망보다는 불안이 엄습하고,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추억보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건 인간이 진화한 과정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심리적 디폴트 값이다. 연약한 인간이 험난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미래에 대한 예측 시뮬레이션 능력이 발달해야 했다. 그리고 사냥 가서 어떤 실수로 동료가 희생되기라도 했다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학습되어야 했다. 둘 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원시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상상은 여전히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후회와 불안에 힘들어한다. 결국 진화의 결과이다.
법륜 스님에게 한 여성 질문자가 물었다. 나이가 61세인데 그간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따른 덕분에 다른 집착은 많이 내려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이가 60을 넘어서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스님은 후반생은 웬만하면 베풀며 살고, 그냥 사는 게 좋다고 하셨다. 나는 '그냥 산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온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냥 살아라'는 말이 답이 되었을까? 그런데 그냥 산다는 건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일까? 아무래도 동양의 노장 철학이기도 하고 불교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 같아 두 관점과 현대의 심리학 면에서 볼 때 어떻게 사는 게 '그냥 사는 것'인지 알아보았다.
불교나 도가(도교)에서 자주 말하는 “그냥 살아라(Just live)”라는 표현을 철학적으로 풀어보면, 단순한 체념이나 무위도식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다.
[불교적 의미]
지금 이 순간, 집착 없이 살아라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존재하는 건 오직 현재뿐이다. 무아(無我), 심지어 ‘나’라는 것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생각·감정·몸이 잠시 모여 있을 뿐이니 집착의 대상이 못 된다. . “그냥 살아라”는 말은 과거의 후회, 미래의 불안에 끌려다니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숨 쉬고, 걷고, 있는 그대로 머물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걷는다면 걷는 그대로, 먹는다면 먹는 그대로. 의미를 억지로 만들지 않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가(도교적) 의미]
자연스럽게 살아라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의미는 억지로 꾸미지 않고,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맡기라는 것이다. 도인은 인위적으로 계획하고 조정하려 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 속에서 조화롭게 산다. 그러니 “그냥 살아라”는 말은 억지로 자신을 꾸미거나 사회적 기준에 맞추지 말고, 본래의 리듬과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라는 의미이다. 강물이 흘러가듯, 바람이 불듯.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도 흐르도록 두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적 확장 개념]
과도한 통제 대신 수용하라
심리학에서는 지나친 목표 집착, 과거 후회, 미래 불안이 현재의 행복을 해친다고 본다. “Just live”는 '수용과 몰입(Acceptance & Flow)'의 원리와 연결된다. 수용이란 상황을 바꾸려 애쓰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고, '몰입'은 현재 활동에 온전히 빠져들기이다. 즉, 완벽한 통제 대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그냥 사는 것”이다.
� 결론적으로, “그냥 살아라”는 말은 의미 없는 체념이 아니라 삶을 억지로 조작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깊은 지혜이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은퇴를 앞둔 후배에게 조언을 한다면 이렇게 할 것 같다.
'이제 우리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과 더 이상 노동의 기회를 제공받기가 어려워졌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좀 부족해도 지금 가진 범위에서 아끼며 맞추어 살 수 있도록 하고 작은 일자리라도 얻으면 감사한 일이지만, 없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신 넘쳐나는 자유시간을 얻었으니 이 시간을 활용해 노동과 돈이 아닌 인생의 다른 의미를 추구해 보는 게 어떠한가. 지금은 더 가지기보다는 있는 것이라도 잘 지키는 게 필요한 시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