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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호 Dec 01. 2020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팬

나는 몇몇 영화와 음악과 게임의 팬이다. 하지만 영화배우, 음악인, 게이머 또는 게임 제작자의 팬은 아니다. 그들에 대해 아는 정보는 얼굴과 이름 정도다. 얼굴과 이름에 대한 정보는 보통 콘텐츠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지긴 하지만, 나의 팬 활동에 꼭 필요한 정보이기도 하다. 알아두면 팬이 될 만한 새로운 작품을 찾을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나온 배우는 또 내가 재밌어할 만한 영화에 출연할 가능성이 높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 가수는 또 내 취향을 저격한 노래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


나는 어떤 콘텐츠를 즐길 때, 영화배우든 가수든 그 콘텐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콘텐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워낙 좋아해서 여러 번 본 작품인 <타짜>와 <부당거래>에는 모두 유해진이 나오는데, 나에게는 그저 '고광렬'과 '장석구'일뿐이다. 유해진의 뛰어난 연기가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속의 인물이 배우의 연기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 그 인물이 연기에 의해 탄생한,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몰입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음악은 '다이나믹 듀오'의 힙합을 좋아하는데, 하도 들어서 다이나믹 듀오의 거의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한다. 하지만 다이나믹 '듀오'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들의 뮤직비디오나 무대 영상은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다. 그래 놓고는 다이나믹 듀오의 이름으로 신곡이 나오면 바로 찾아서 반복 재생으로 듣는다. 다이나믹 듀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나에게 다이나믹 듀오라는 가수는 그저 그들의 음악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일 뿐이다.


물론 유해진과 다이나믹 듀오는 능력과 매력을 모두 가진 사람이기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직업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속마음을 알 방법은 없지만, 아마도 자신이 사랑받는 것보다는 자신이 노력해서 만든 콘텐츠가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을 더 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나처럼 작품만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한 팬으로 생각해주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가 있다.


작품만 사랑하는 팬은 사람을 사랑하는 팬에 비해 장점이 많다. 우선 감정에서 자유롭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짝사랑인데, 이뤄질 가능성이 없다시피 한 짝사랑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은 집착으로 번져 본인의 삶을 도외시한 채 연예인의 행복만을 바라기도 하고, 사랑이 절망으로 번지면 안티팬으로 급변해 악성 댓글을 달기도 한다. 반면 작품을 사랑한다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애정의 결핍이 없는 짝사랑이 된다. 감정적으로 흔들릴 이유가 없다. 내 맘대로 좋아했다가 내 맘대로 그만둘 수 있고, 어느 날 또다시 좋아할 수도 있다.


또한, 작품을 사랑하는 팬은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뭐라도 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 욕구를 회사에서는 놓치지 않는다. 연예인이 생산하는 콘텐츠 외에도 굿즈니 콜라보니 하는 상품을 열심히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판매한다. 상술에 홀라당 넘어간 팬은 어느새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잔뜩 쌓아두고 만족감과 함께 가벼워진 지갑을 얻게 된다. 반면 작품을 사랑한다면 돈이 아닌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그 작품의 제작 과정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보기도 하고, 감상 후 느낀 점을 글로 표현해보기도 하며, 다른 사람과 감상평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들어간 시간만큼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지지만, 들어간 돈은 이미 정해진 작품의 가치를 넘지 않는다.


특별한 무언가의 팬이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매력적인 사람의 팬이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스스로를 감정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팬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본인을 감동시킨 작품 그 자체의 팬이 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나를 아는 사람들만 사랑하며 살기도 벅찬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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