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호 Dec 30. 2020

구치소와 요양병원, 코로나와 인권

구치소나 교도소에 사는 사람도 아플 때가 있다. 때로는 암에 걸리기도 한다. 작년에 수감 중인 한 분이 직장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다. 환자는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형 집행정지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 달 동안 매일 법무부 직원 둘이서 환자를 휠체어에 구속한 채 병원에 방문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는 짧은 시간 동안에만 구속을 풀었는데, 구속이 풀린 환자를 보면 괜히 겁이 나곤 했다. 편견을 갖지 않으려 해도, 몸의 반응까지 조절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환자와 마찬가지의 치료를 시행했고, 아무 문제없이 치료는 종료되었다.


죄를 짓고 갇힌 수감자라 하더라도 병을 치료받고 건강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더라도 법에서 정한 죗값을 초과하는 건강상의 죗값을 치러서는 안 된다. 수감자가 갇힌 상태에서 어떤 병에 걸리면 '꼴좋다'하고 방치할 게 아니라 치료를 제공해야 하고, 심지어 사형수라 하더라도 감염병에서 보호받지 못해 사망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서울의 한 구치소에서는 코로나 통제에 실패해 전체 수감자의 30%에 달하는 인원이 대량으로 감염됐고, 사망자까지 발생하였다.


요양병원은 상황이 좀 더 심각해 보인다. 인턴 시절 다양한 요양병원을 방문했었는데, 요양병원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진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는 대형병원에서 굵직한 수술이나 치료를 받은 뒤 잠시 머무르며 회복하는 병원이다. 이곳은 환자들이 상대적으로 젊고, 건강이 나쁘지 않으며, 의료진 역시 충분하다. 요양병원을 경험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요양병원을 이 정도의 병원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요양병원은 집에서 감당이 안 되는 병을 가진 노인들의 가족이 병원에 돈을 지불하여 사망할 때까지 맡기는 곳이다. 다음 기사를 읽어보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봐야 하는 기사다.


숨 멈춰야 해방되는 곳… 기자가 뛰어든 요양원은 ‘감옥’이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요양병원은 아마 후자의 병원일 것이다. 후자의 병원은 보통 수익이 목적이라 의료진을 많이 고용하지 않는다. 저런 병원에는 보통 환자 수십 명당 한 명의 의사가 있고, 간호사 역시 소수다. 대부분의 직원은 응급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직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염병 전문가가 존재할 수 없는 인력풀이고, 있다 해도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의료 설비와 약제가 없다. 시설은 오로지 다수의 환자 수용만을 목적으로 만들었기에, 단 한 명의 환자도 안전하게 격리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병원 안으로 한 번 들어온 균과 바이러스는 모든 환자를 거치게 된다. 환자 구성은 어떤가. 대부분 의사소통이 어렵고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노인 환자들로, 코로나에 걸리면 중환자가 될 확률이 매우 높은 환자군이다. 요양병원은 이름만 병원이지 실제로는 다른 어떤 시설보다도 코로나에 취약한 곳이다.


현재 전국 수십 개의 요양병원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하고 있다. 직원 환자 가릴 것 없이 감염이 확산되고 있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하는 환자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름만 병원인 곳에서 환자를 꺼내 진짜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하는데, 지금 요양병원은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동일집단 격리'를 당하고 있다. 동일집단 격리는 자체적으로 코로나 대응이 가능한 병원에서나 하는 일이다. 의료진과 설비가 충분하고, 감염에서 안전한 장소를 확보할 수 있는 병원이라면 이겨내겠지만, 요양병원은 절대 불가능하다. 요양병원에 동일집단 격리를 시행한다는 것은, 그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코로나에 걸리고 그중 살아남은 사람만 밖으로 나오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구치소와 요양병원에서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무관심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인권을 가장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럴 이유가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사회에 어떠한 좋은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국가의 세금만 잡아먹는 존재들이라고. 이미 국가에 의해, 가진 병에 의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지 않냐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최소'라는 기준을 코로나가 정해주고 있다고 느낀다.


구치소에 사는 사람들은 수백 명이 감염될 때까지 마스크를 제공받지 못하고 확진자와 섞여 지내다가, 언론에 보도된 뒤 마스크를 받고 1인실이 있는 교도소로 이송됐다. 요양병원 사람들은 격리당한 채로 죽어가다가, 함께 갇혀있는 의사가 언론에 알리고 나서야 의료인력이 투입되어 다른 병원으로 전원되기 시작했다. 이 사회는 그들이 이미 고통받을 대로 고통받은 다음에야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당한 처우를 듣는 순간 '이건 아니다'라고 느꼈고 여론을 통해 그들의 처우를 바꿨다. 인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에 대한 목소리가 '코로나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국가가 지켜주지 못했을 때 나온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두 스님과 두 교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