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호 Dec 24. 2020

두 스님과 두 교황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두 교황>

얼마 전 혜민 스님 논란이 있었다. 방송에 나온 모습이 흔히 알려진 불교의 가르침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 속의 혜민 스님은 잘 먹고, 잘 자며, 가진 게 많고, 돈을 벌기 위한 활동에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솔직히 혜민 스님이 대중의 비난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이고, 재산 형성 과정과 소비 과정이 합법적이라면, 누가 얼마를 벌어 어디에 쓰든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스님도 부자가 될 자유가 있다.


논란 그 자체보다는 논란 이후 혜성처럼 나타난 현각 스님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현각 스님은 논란이 터지자 혜민 스님을 기생충, 도둑놈, 사업가, 연예인 등으로 묘사하며 맹공을 퍼붓더니, 하루 만에 "혜민 스님은 내 영원한 진리의 형제일 것이고 그의 순수한 마음을 존중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혜민 스님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다시 공부하겠다"라고 했다. 둘의 마음이 변하는 과정에는 무려 70분 동안의 통화가 있었다는데, 이 통화의 내용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나눴길래, 서로의 태도를 180도 바꿀 수 있었던 걸까? 의외로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다룬 영화 <두 교황>을 보며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교황> 속 두 교황의 묵직한 대화에는, 왠지 모르게 혜민과 현각 두 스님이 나눴을 것만 같은 대화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두 교황>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픽션이다. 영화에는 전대 교황인 베네딕트 16세와 현재 교황인 프란치스코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둘의 관계는 아주 특별하다. 이전 교황이 사망한 후 다음 교황이 선출되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베네딕트 16세의 자발적 사임으로 인하여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현재도 두 분 모두 살아계신다). 영화 속 시기는 베네딕트 16세가 사임하기 얼마 전으로, 추기경을 그만두기 위해 찾아온 프란치스코(추기경 시절 이름은 베르골리오)와 베네딕트 16세의 대화를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둘의 대화는 실로 심오하다. 교황과 추기경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비록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답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 번째 주제는 종교의 역할이다. 교회를 숭고하게 유지하며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죄인을 용서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한다. 이후 변화와 타협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종교는 항상 같은 것을 가르쳐야 하는지, 아니면 세상의 변화에 맞춰 종교와 종교인도 변화해야 하는지, 그리고 변한다면 그 이유는 타협인지 진짜 변화인지에 대한 토론이다.


토론의 결과와는 별개로, 둘의 토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토론에 임하는 태도이다. 둘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고, 때로는 격앙되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 상대를 부정하거나 본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를 인간적으로 배려하고, 존중한다. 아주 오랜 시간 인간을 사랑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토론 주제 역시 결국에는 인간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아주 격하면서도 매우 선한 토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들의 토론의 결말은 다름 아닌 고해성사다. 일련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깊게 이해하게 된 둘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에게 가장 큰 죄책감을 갖게 하는 죄를 상대에게 고백한다.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고,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또 한 번의 인간적, 종교적 성장을 이뤄낸다. 성장한 그들은 이제껏 걸어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로 한다.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교황에서 사임하고,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 프란치스코가 된다.


혜민과 현각 스님의 대화도 영화 속 두 교황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토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생겼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며, 불교에서 중시하는 어떤 깨달음을 얻어 하루 만에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종교인들의 대화를 보며, 종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어떤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길래, 그토록 격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한 답은 '양심'이다. 우리는 종종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할 때가 있다. 그 결과 불필요한 것에 욕심을 내고, 변화하기는커녕 타협하기 일쑤다. 스스로 뻔히 알면서도, 남들은 모를거라 생각하며 죄를 짓는다. 하지만 종교는 이런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과 용서를 통해 변화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미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는, 마음속 양심이란 존재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우리가 양심적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돕는다.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살면 된다." - 교황 프란치스코

작가의 이전글 평생 공부하는 삶, 공부에 대한 고민과 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