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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May 16. 2020

들켜버린 천재성, 시작된 비극

의대에는 전교 1등만 온다는 말이 있다. 한 명 한 명 물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입학 동기 20명 중 현역으로 온 친구들에게는 얼추 맞는 말일 듯하다. 하나같이 성실하고 학업에 열정이 있었다. 반면 재수, 삼수, 심지어 사수를 거쳐 온 형님 중에는 고등학교 때는 막살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의대에 왔다는 고백도 꽤 있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첫인상이 만만해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도 고등학교에서는 한 가닥 했지만, 여기서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똑똑한 사람만 모아 놓은 집단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똑똑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다시 나뉘기 마련인데, 첫 시험인 1학기 중간고사가 새로운 분류의 기준이 되었다. 의대는 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구성되는데 예과 때는 놀아도 된다는, 놀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학교 전체에 팽배했다. 수업 시간인데도 놀자고 불러내는 선배도 많았고, 대부분 낙제를 하지 않는 최대 결석 한도까지 수업에 빠지곤 했다. 자연스럽게 첫 시험은 노력보다는 재능을 평가하는 시험이 되어버렸다.

 

시험 직전에는 그래도 벼락 치기를 하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놀 때에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던 형이 있었는데, 인성도 아주 훌륭해서 본인의 필기를 나눠주곤 하였다. 다들 그 필기를 붙잡고 급하게 공부를 하는데, 나는 그 마저도 귀찮아서 될 대로 돼라 하고 준비 없이 시험장에 들어갔다. 다행히 고등학교 시절 학원에서 공부한 내용과 겹치는 게 많아서 아는 문제는 열심히 풀고 나왔다.


며칠 후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그 똑똑한 친구들이 나를 향해 천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과목에서 중간 이상의 등수가 나왔는데, 노력보다는 잘 나왔지만 그렇게 대단한 성적은 아니었다. 화학 시험 결과가 그 원인이었다. 항상 열심히 공부하던 모범생 형과 동점으로 공동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화학 시험 전 공지에서 계산 문제가 많으니 계산기를 가져오라 했는데, 깜빡하고 안 가지고 들어갔었다. 별 수 없이 시험지 구석구석의 공간을 활용하여 열심히 손으로 계산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계산이 매우 정확하여 고득점을 하고 만 것이다. 사실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는데, 채점하는 화학 조교가 숫자로 빽빽한 내 시험지를 보고는 감탄하여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녔다. 순식간에 공부 한 글자 안 하고 계산기도 없이 1등을 한 천재가 되어버렸다.

 

평생 천재처럼 살았다는 결말이면 참 좋겠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평생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사실은 우물 안 개구리였고,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매우 많다는 것이 증명될까 봐 두려워하던 스무 살의 박시호가 있었다. 그 두려움은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어서 내가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컸던 것 같다. 첫 시험을 통하여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해소되자 '나는 진짜 천재다'라는 오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나의 무의식을 지배하여 엉뚱한 길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최대 관심사였던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오로지 '천재성을 계속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 '공부를 안 하고 좋은 성적 받기'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략이 선택됐다.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고 다녔다. 그 오만함은 결국 몰락을 가져왔다.


학기가 지나면 지날수록, 공부 내용은 점점 많아지고, 점점 어려워졌다. 그에 비례하여 성적은 점점 떨어졌지만, 정신을 차리기에는 더 큰 충격이 필요했다. 예과에서는 겨우 진급했지만, 본과 1학년이 되어 학점 미달로 결국 유급을 하고 말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역시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라는 자각이 생기며 오히려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후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부하여 의사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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