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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May 18. 2020

동아리라구요? 가입하겠습니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한 학번에 40명밖에 없었지만, 꽤 많은 동아리가 있어서 다른 과에 있을법한 동아리는 다 있었다. 동아리마다 거창한 설립 목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였던 의대생이 동아리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우기는 힘들었다. 대부분의 동아리는 친목 도모가 주된 활동이었으며, 몇몇 공연 동아리들도 엄청난 공연을 만들기보다는 함께 연습하고 점점 발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대부분의 동아리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상하게 느껴질 텐데, 본의 아니게 두어 개의 동아리를 제외한 모든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슈퍼 핵 인싸’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입학할 때만 해도 동아리 활동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1년 정도 지나고 보니 죄다 가입이 되어 있었다. 각 동아리에서의 활동은 다른 글에서 차근차근 풀기로 하고, 우선 수많은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사연부터 적어본다.  

 

가장 먼저 가입한 곳은 밴드부였다. 대학교에 입학했더니 신기하게도 고등학교 선배가 한 학번에 한 명씩 있었는데, 신입생이 온 기념으로 진행된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서 정신 개조를 당했다. 모임에서 동아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알고 보니 선배들이 다들 동아리나 학생회에서 한 자리씩 맡고 있는 소위 ‘인싸’였던 것이다. 나의 ‘아싸’ 기질을 참지 못하고 모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한두 학번도 아니고 네다섯 학번 차이나는 대선배들이 공격하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가입해 보겠다고 했더니 동아리 추천이 이어졌고, 중학교 때 두어 달 정도 맛보기로 배운 드럼 경력을 살려 밴드부를 해보겠다고 했다. 들어갔더니 술을 상당히 많이 먹는 것 외에는—매 모임마다 냉면 그릇에 술을 채워 먹는 ‘사발식’이 있었다—여러모로 훌륭한 동아리여서 졸업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하나를 가입하니 두 번째부터는 쉬웠다. 고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좋아해서 농구 동아리에 가입하고, 컴퓨터 게임을 좋아해서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했다. 컴퓨터 동아리는 들어가 보니 딱히 컴퓨터에 관련된 활동은 없었고,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맛있는 밥을 사주는 동아리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스무 살의 박시호는 먹성이 대단했다. ‘최고의 동아리를 찾았구나!’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동아리가 더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름만 듣고 기피했던 분자생물학 연구 동아리와 정치 토론 동아리도 사실 하는 것은 없고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 모이는 동아리였던 것이다. 모두 가입해서 신나게 밥을 먹었더니 수많은 선배들과 알게 되었고 좀 놀 줄 아는 녀석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참고로 밥만 먹는 동아리들은 그 존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몇 년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입학 초반부터 동기들이 궁금해하던 질문이 있었다. ‘기획부에는 누가 뽑힐까?’ 하는 질문이었는데, 추가 합격으로 인해 새터에 참여하지 못했던 나는 ‘기획부’가 어떤 동아리인지 몰랐다. 알고 보니 기획부는 새터 등의 교내 행사를 기획하는 동아리로, 행사 오프닝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춤을 추는 역할까지 맡고 있어서 사실상 ‘댄스 동아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단순 춤 동아리에 왜들 그리 관심이 많은가 했더니, 아주 특별한 선발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선배들이 한 달간 지켜본 뒤, 춤을 좀 추거나 분위기를 띄울 줄 아는 신입생을 남자 2명, 여자 2명 지목하는 것이었다. 지목당한 신입생에게는 거부권이 없어서, 자동으로 기획부에 소속되어 춤을 춰야만 했다. 비(非) 민주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 달간 학교 전체의 관심사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춤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한 달 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쌓은 명성 덕에 기획부에 지목이 되고 말았다. 기획부는 군기도 강한 편이고, 밥을 사주긴 하는데 대단한 밥은 아니어서 하는 동안 불만이 좀 있었다. 심지어 심각한 몸치라서 감히 무대에 올라가서 흔들면 안 되는 몸의 소유자인데, 그나마 의대에 몸치가 많아서 정상참작이 됐던 것 같다.


가입한 동아리는 웬만하면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 중간에 유급을 하는 바람에 비중 있는 동아리의 회장을 맡지는 않았고, 망해가는 컴퓨터 동아리의 회장을 맡아 게임 대회를 열어 초대 우승자가 된 것이 나름의 업적이다. 무엇보다도 동아리의 몇몇 선후배들과 아직까지 이어지는 끈끈한 유대감이 내가 거둔 최고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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